선천적 용기 결핍 증후군을 아시나요?
우리 몸에 ‘용기’라는 유전자가 있다면, 아마 나는 선천적으로 그 유전자가 없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 아예 용기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커다란 몸뚱이에 비해 함량 미달이랄까? 내게 용기는 마치 바나나맛 우유에 들어간 0.3%의 과즙 같았다. 용기가 없다고 말하니 너무 나약해 보이지만, 늘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와 싸운다거나 선생님께 혼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용기가 없다 보니, 하지 말라는 행동은 절대 안 했다. 그래서 내 인생은 큰 굴곡 없이 늘 완만했다. 어릴 땐 친구들이 숙제를 안 해오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쟤는, 선생님께 혼나는 게 겁나지도 않나?”
이런 내 모습은 성인이 된 대학시절에도 이어졌다. 대학교 4년 중에 3년 정도를 기숙사에서 살았다. 기숙사에는 규칙이 꽤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방에서 배달 음식을 먹으면 벌점을 받는다는 거였다. 학기초가되면 새로운 룸메이트들과 모여 입방식을 했다. 보통은 방에서 치킨을 시켜 먹고, 간혹 밖에서 술을 한잔 하기도 했다. 치킨을 시킬 때는 방 한가운데 모여 택배박스로 식탁을 만들었다. 하하 호호 모두가 즐거워하던 순간에도 나만 늘 불안했다.
“사감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쩌지?”
“벌점을 받으면 어쩌지?”
기숙사 입구는 12시가 되면 문이 잠겼다. 그래서 정각이 되기 10분 전에는 다들 기숙사를 향해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낙오자는 도서관에서 쪽잠을 자며 아침까지 버텨야 했다. 바깥에서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던 동기들도 문 닫기 10분 전에는 다들 각자 살기 바빴다. 12시가 되면 기숙사 유리문을 경계로 희비가 엇갈렸다.
자정 넘어 동기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십중팔구 비상구를 몰래 열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비상구는 기숙사 지하 식당 구석에 있었다. 이 부탁이 위험한 이유는 걸렸을 경우 문을 열어준 사람과 들어온 사람 모두 즉시 퇴실이었기 때문이다. 벌점도 아니고, 즉시 퇴실. 내게 있어 이 부탁은 중대한 범죄에 가담해 달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20대 젊은 청춘들에게 퇴실 따위는 겁낼게 아니었는지,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받고 이를 거절할 때마다, 마치 배신자로 낙인찍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상구를 열어주는 게 우정의 척도가 되는 나이였다.
한 번은 도저히 거절하기 힘들어, 승낙을 했다. 순찰을 도는 경비아저씨를 피해 몰래 지하로 들어가 비상구 문을 열었다. 다행히 걸리지 않아 큰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그날 밤은 심장이 너무 뛰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는 밤 12시 이후에 오는 전화는 절대로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