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끄적거림

결국 예술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되다.

by 진영
불행이라 생각했던 나날들도, 결국 완성될 그림을 위해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 온다.


대학교 4학년 겨울, 졸업을 앞두고 맞이하는 마지막 계절이었다. 나에게 이 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바쁜 계절이었다. 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기숙사에 남아 도서관과 기숙사를 오가며 내년 봄에는 학생이 아닌, 어엿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계속 이어나갔다. 올해의 끝자락에 다가갈수록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하얀 눈까지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뒤덮였다. 책상에 앉아 바라본 창문 밖 세상은 매우 추운 겨울이었지만, 도서관 안은 늘 따듯했다. 늦은 시간까지도 내년 봄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2020년 作, 무거운 비에서 가벼운 눈으로. created by 진영.



방학이었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나의 생활 패턴은 늘 한결같았다. 기숙사, 도서관, 영어학원의 반복이었다. 이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에 나는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하나둘씩 쌓여 온 불규칙한 습관들과 스트레스가 이윽고 펑하고 터져버렸다. 조금만 푹 쉬면 금세 회복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나의 건강상태는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지극히 평범했던 나의 인생에 예상치 못했던 변곡점 하나가 덩그러니 찍혔다. 일상이 변하는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건강문제로 인해 취업준비를 중단하고, 요양을 하기 위해 고향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 계기로 나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도서관과 기숙사를 오가던 생활이 이제는 뒷산을 오르거나, 바닷가에 앉아 홀로 바다를 바라보는 일로 바뀌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졸업식조차 참석하지 못한 채, 나의 대학 생활과 학생 신분도 끝이 났다. 이후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업을 했고, 사회인이 되었다. 나만 혼자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주변인으로 남겨져 조금 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2019년 作, 바라면 닿을까. created by 진영.



시골에서의 삶이 점점 더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나는 뭔가 소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을 궁리했다. 하루는 책상에 앉아 무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초등학교 때 배운 사군자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 길로 문구점에 들러 2천 원짜리 붓펜과 노트를 새로 샀다. 사군자를 그렸고, 부모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고향집에서 머문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나갔다. 건강은 꽤 회복되었고 이제는 고향에서 그림만 그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먹여 살리는 그런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야만 했다. 때마침 먼저 취직한 대학 동기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머물며, 취업준비를 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해주었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고향을 떠나, 그곳에서 머물며 다시 취업준비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 집에서 취업을 준비하면서부터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었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토익책에 있는 문제를 풀었고, 자소서를 써 내려갔다. 하루는 자소서의 빈칸을 좀 채워보고자 가볍게 공모전 사이트에 들어갔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하게 그림 공모전 공고를 발견했다. 화학을 전공한 나의 취업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 하나로 붓펜과 스케치북을 다시 꺼내 들었다. 공모의 주제는 지하철에서 맞이하는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지하철에 앉아 있는 취준생의 모습을 그리고, 그 옆에는 자작시 한 편을 적어 제출했다. 자소서는 수 십 개를 지원했어도 모두 탈락했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처음 지원한 그림 공모전에서는 단번에 당선이 되었다. 그리고 전시까지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2017년 作, 지하철에 들어 서면 나는 꿈을 꾼다. created by 진영.



전시 첫날, 나는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스스로 전시 도우미에 자원했고, 내 작품을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기로 했다. 전시장의 문이 열린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께서 들어오셨다. 첫 전시의 첫 관람객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전시된 그림들을 쭉 둘러보시더니, 이내 내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림과 자작시를 한참 동안 바라보시더니, 웃으시며 핸드폰으로 내 작품을 사진으로 담으셨다. 아주머니가 웃으시며 내 작품을 사진으로 담는 그 순간, 나는 심장에서 찌릿함을 느꼈다. 무언가 모를 뜨거움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왔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설렌다는 감정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누군가가 내 작품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 즐거웠다. 내 마음이 내게 신호를 보냈다. 너의 꿈은 바로 이것이라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건강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날, 나는 도태되고 불행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에서 요양을 하며 보낸 그 시간들 덕분에 나는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고, 취업준비생에서 지금은 글과 그림을 창작하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불행이라 생각했던 나날들도, 결국 완성될 그림을 위해 꼭 필요한 조각들이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2019년 作,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꽃들에게. created by 진영.



-그림 계정-

https://grafolio.naver.com/tkanfkdlryz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