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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사이트 SEO Apr 19. 2021

초한지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 비교


서로 다른 개성과 서로 다른 리더십으로 각 나라의 왕이 된 사람들 유방과 항우. 유방과 항우의 리더십 특징과 차별점을 통해 리더로서의 가치관과 태도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초한지는 뚜렷한 원전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중  유방전,항우전,장량전 등을 엮어서 하나로 합친 것이 요즘 우리가 아는 초한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특별한 원저자는 없다는 게 중론이고, 한나라 육가가 저술한 초한춘추, 사마천의 사기 등의 내용을 토대로 명대의 서한연의 등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정도입니다. 


초한지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직 삼국시대가 시작하기 한참 전 고조선 말기 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 오래전 일이라고 보입니다.  



프롤로그(Prologue)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 영정(嬴政)이 사망했다. 영원하리라 장담하던 진 제국은 곧바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다. 진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의 도움으로 형 부소를 없애고 진나라 2대 황제가 된다. 이후 조고는 이사마저 없애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채 사실상 나라를 마음대로 다스렸다고 하는데, 그 폐단과 부패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인 지 겨우 십여 년에 불과한 중국 대륙은 여기저기서 들끓기 시작했다. 천하대란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진승(陳勝)이라고 한다. 머슴 출신인 그는 병력 소집에 따라 집결지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린 비로 기한에 맞춰 도착하기 불가능해지고,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그것은 곧 죽음이므로 “어차피 죽을 바에는 되든 안 되든 한 번 일어서 보자!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 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라는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비록 6개월 만에 패망했으나,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일어나면서 진시황의 통일대업은 허무하게 쓰러져 버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 


시대적 배경을 알고 가기 위해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따온 내용을 프롤로그로 사용해 봤습니다. 그럼 초한지의 두 주인공 항우와 유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초패왕이라 불리던 항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항우(BC 232~202, 30세)

중국 역사상 후세 사람들이 앙모하여 묘를 세우고, 향을 피우며 철 따라 제사를 올리는 장수가 3명 있다고 합니다. 남송의 이순신 장군이라 알려진 충성의 악비岳飛,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주군에 대한 충의와 의리의 화신 관우關羽(관성제군關聖帝君), 그리고 초한대전의 영웅 항우項羽입니다. 


항우는 초나라 명장 항연 장군의 손자이고 농민봉기 지도자 항량(項梁)의 조카입니다. 전국시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조부와 부친이 사망하자 삼촌인 항량에게 맡겨져 비교적 가난하게 성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진나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거병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키가 8척에 이르렀고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 하여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병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항우는 이미 검술과 전투에 능했으며 각종 병장기를 잘 다루었다고 전합니다. 삼촌 항량이 살인을 저질러 가족 모두가 회계(會稽, 현재의 쑤저우 蘇州)로 달아나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마침 회계군으로 행차하는 진나라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보고 '내가 진시황을 죽이고 황제에 오를 테다'라고 호언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항우는 유방과 중국 천하를 두고 경쟁하였는데 팽성 전투에서 고작 5만 명의 군사로 56만 명의 유방 군사를 무찔렀습니다. 하지만 수하의 장수들이 항우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왕 유방에게 투항하는 일이 생겼고 유방은 주변 세력을 연합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이 때문에 항우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고, 적과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垓下)에서 한왕(漢王) 유방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어 자살하게 됨으로써 초-한 대전에서 패자가 됩니다. 이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虞姬)와 헤어지는 모습을 두고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고사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항우는 강력한 군사력과 패기, 용맹으로 단숨에 천하를 장악했으나 마지막 순간 측근들의 배신과 정치력 부재, 정책 실패로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의 실패 요인으로는 너무 이른 나이(24살)에 기의 한 데다, 성격이 급하여 한 번의 실패에도 좌절하였고, 포로들을 생매장시키는 잔인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랫사람을 잘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본래 자신의 부하였지만, 후에 반 항우 진영으로 참여하는 진평, 한신 등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고, 논공행상의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유방 진영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자신에 대한 오만함과 편견을 지닌 전형적인 독불장군 스타일로 자기 자신만을 믿는 자존심 강한 성격을 지닌 사실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비록 항우는 현실의 정치력에서는 한고조 유방에 밀려 천하를 얻지는 못했지만, 진秦나라 주력부대를 격파한 거록에서의 전투, 강동의 부모들을 차마 대하지 못하겠다는 참회의식, 우희와의 사랑과 비장한 이별장면, 최후의 순간 애마 추를 정장에게 선물하고 자신의 머리를 옛 부하에게 헌납해 버린 호걸의 자세 등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고 있으며, 그의 실패 또한 많은 교훈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항우는 본인 스스로가 체력, 지략, 무예, 병법에 실제 능하다 보니 스스로는 너무 믿는 반면 참모나 다른 사람의 얘기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 대인배를 지향하는 성격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이후에는 초왕(의제)을 학살하는 하극상, 불공평한 논공행상, 진 투항군 20만 명 생매장, 진 시황 릉 훼손, 아방궁 파괴설 등 어쩌면 포악하다 못해 잔인한 성격으로 정치를 행했습니다. 


항우를 설명하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 만한 기상이라는 뜻인데 과연 얼마나 대단한 사내였는가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항우는 거의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의 신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항우[項羽] (두산백과)


※ 우희가 중국의 역사적 미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중국의 4대 미녀를 소개합니다. "월나라 서시, 한나라 왕소군, 여포와 동탁의 초선,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 양귀비"입니다.



다음은 한나라 통일의 업적을 이룬 유방입니다.


유방(BC 247~195, 52세)


유방은 패현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백수건달이었습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싸움질하는 나날 속에서도 왕도와 패도를 논하는 등 남다른 데가 있어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면 유방의 인격이 매우 복잡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지나친 애주가요 호색가이며 속 좁고 질투심도 많은 이중적 성격과 냉혹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너그럽고 어질고 솔직한 듯했으나, 속으로는 마음에 꺼리는 바가 많았고 벽을 많이 쌓은 사람이었다는 게 사마천의 시각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확실히 교활하고 음험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시정잡배와 같이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히며, 아랫사람에게 욕설을 퍼붓는 오만불손함이 있던 반면 통이 크고, 멀리 크게 보는 안목과 천하쟁패에 결정적인 승리 요인으로 작용하는 넓은 도량과 임기응변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승이 봉기했을 때 유방의 나이는 이미 마흔이 가까웠으며, 고향 패현의 관리를 죽이고 봉기하여 스스로를 패공(沛公)이라 칭하고 수천 명의 병력을 모은 뒤 항우에게 찾아가 합류합니다. 많은 전투와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는 패망했고, 유방은 서쪽 변방 촉 땅의  한왕(漢王) 봉록을 받게 됩니다. 유방은 촉 땅에 들어가며 중원과의 통로인 잔도를 불살라 결코 항우의 중원을 넘보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그 해가 가기 전에(BC 206년) 예전에 사용했던 잔도를 보수하고서 중원 침공을 개시하며  ‘초-한 대전’을 시작합니다.


유방은 장량, 소하, 한신을 적절히 활용해 전투를 잘 이끌었을 뿐 아니라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영포, 팽월 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BC 202년, 해하 싸움에서 항우는 유방에게 결정적으로 패하고 자살함으로써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


유방은 건달이었음에도 비교적 도량이 넓고, 친구(소하, 번쾌 등 이 고향 친구)가 많았습니다. 항우의 독선적 리더십과는 달리 참모나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 경청하고 가능한 수용하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또 스스로 능력의 한계와 힘의 나약함을 알고 연합하고 협력하는 리더입니다. 자주 패하고, 도주하는 상황을 마주하지만 비교적 밝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극복하려는 성향도 보입니다. 또, 인재를 등용하고 민중을 포용하고 공평한 논공행상을 할 뿐 아니라,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관용을 보이는 용인술의 대가입니다. 물론 전쟁터마다 여자를 찾고, 돈과 술을 좋아하는 백수 한량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축하연을 벌이는 자리에서 자신에 대해서 표현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 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하느냐 하면,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안다. 반면 항우(項羽)는 단 한 사람, 범증(范增)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천하를 얻고, 항우는 얻지 못한 것이다.”



유방의 리더십을 알 수 있는 한신과의 일화가 있습니다.


회음후로 강등된 후 잡힌 한신과 유방의 대화입니다.


유방 :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병사를 지휘할 수 있겠소


한신 : 10만입니다.


유방 : 그대가 지휘할 수 있는 군사는 얼마나 되오?


한신 :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습니다.


유방 : 그런 그대가 왜 내게 잡혀있는 거요?


한신 : 저는 병사를 잘 통솔하지만 폐하께서는 장수들을 잘 통솔하기 때문입니다.



항우와 유방의 리더십이 극명하게 차이나는 소재가 있습니다.


항우의 "어떠냐(何如, hérú)!“vs 유방의 “어떻게 하지(如何, rúhé)?"


항우의 "어떠냐?"

항우는 싸워서 이길 때마다 부하들을 향해 이 말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대 최고의 전사이자 지도자임을 자부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통의 부재, 권위주의의 구시대적 리더십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유방의 "어떻게 하지?"

유방이 전쟁을 할 때마다 참모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닥친 어려움에 대한 계책을 촉구하는 말이자, 참모들의 지략과 방법을 빌려 달라는 요구이고 여론을 중시하겠다는 의지하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소통형, 인적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현대적 리더십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초한지에 언급된 표정과 성격



아래는 유방의 사람들에 대한 참조 이미지입니다.



참고로 초한지에서 유례 된 고사성어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건곤일척(乾坤一擲)


당나라 제일의 문장가 한유가 옛날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싸우던 홍구(鴻溝)라는 곳을 지나다 초(楚) ·한(漢)의 옛 일이 생각나서 지은 <과홍구(過鴻溝)>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


용은 지치고 호랑이도 피곤하여 강과 들을 나누어 가지니 [龍疲虎困割川原]

이로 인해 억만창생의 목숨이 살아남게 되었네 [億萬蒼生性命存]

누가 임금에게 권하여 말머리를 돌리게 했는가 [誰勸君王回馬首]

참으로 한번 겨룸에 천하를 걸었구나 [眞成一擲賭乾坤]


무수한 초-한 대전에서 승부가 나지 않았고 결국 홍구 지역을 기준으로 서쪽을 유방이, 동쪽이 항우가 갖기로 하면서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이때 유방이 철군하려 하자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기세가 약해진 초나라 군대의 틈을 타 마지막 결전을 벌일 것을 촉구하였다. 결국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천하를 걸고 단판 승부를 벌였고 그 결과 항우는 대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방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권토중래(捲土重來)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두목은  항우(項羽)가 유방(劉邦)과 패권을 다투다 패하여 자살한 오강(烏江)에서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니, 부끄러움을 안고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라네.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왔다면 어찌 되었을까(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라고 읊으며 아쉬워하였다. 항우가 패전의 좌절을 딛고 훗날을 도모하였다면 다시 한번 패권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권토중래는 어떤 일에 실패하였으나 힘을 축적하여 다시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금의환향(錦衣還鄕)


진나라를 멸한 후 항우의 참모 한생이란 자가 간하고 나섰습니다. “관중은 뛰어난 요충지이자 비옥한 곳입니다. 이곳을 근거로 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항우가 대답합니다. “성공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비단옷을 입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말을 들은 한생이 중얼거립니다. “초나라 촌놈들은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꼴로 머리를 쓸 줄 모른다고 하더니 그 말이 과연 맞는 말이군.”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항우는 한생을 즉시 죽여 버리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향합니다.



배수지진(背水之陣)


한신이 위나라를 격파한 후 유방에게 군사를 다 뺏기게 되어, 적은 병력으로 제나라와 싸울 때 쓴 전략. 한신의 군대는 강을 등지고 진을 쳤고, 주력부대는 성문 가까이 공격해 들어갔다. 한신은 적이 성에서 나오자 배수진까지 퇴각하는 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조나라 군대가 성을 비우고 추격해 올 때 군사를 성에 매복시켜 조나라 기를 뽑고 한나라 깃발을 세우게끔 했다. 물을 등지고 진을 친(背水之陣) 한신의 군대는 목숨을 걸고 결사 항전을 하여 조나라 군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뜻으로, 중국 춘추시대 월(越) 나라 재상 범려(范蠡)의 말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한신의 힘(반역)을 두려워한 유방이 한신을 연회에 불러 체포하려 하자, 한신이 종리매의 목을 들고 가 무고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한신이 스스로 한 말



파부침주( 破釜沈舟)


항우가 진의 정예병이 있는 거록의 전투에서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밥솥을 깨트리고, 강을 건너온 배를 물에 가라앉히는 방법으로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은 방법, 한신의 배수지진의 모티브가 됨



사면초가(四面楚歌)


해하 전투에서 항우의 군사가 유방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있을 때 장량이 펼친 심리전 군세가 불리하고 오랜 기간 집에서 떠나온 초나라의 군사들에게 고향의 노랫소리를 들려주어 무력감이 들게 하는 전략



지록위마(指鹿爲馬)


환관 조고는 진시황제가 죽자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었고,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처치하고 자기가 승상이 되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 [指鹿爲馬(지록위마)]’ 무슨 소리요?”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조고가 짐짓 우기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사슴입니다.’라고 바로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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