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0년 경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사람들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그 불안은 부정부패, 도덕적 해이, 중우정치를 불렀다.
그는 대중의 여론으로 인해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쳐야 했다. 인류의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그렇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의 죽음을 중우정치(mobocracy) 의한 살인으로 정의 내렸다.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으로 새로운 이상국가를 생각한다. ‘국가론’에서 그는 이상국가는 세 가지 계급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상국가에서는 적당한 인구를 유지하도록 성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제비뽑기에 의해 성적 대상을 뽑는데 이 제비뽑기는 실상 통치자가 이미 조작해 놓은 상태다.
이 조작의 의도는 무작위로 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우수한 혈통은 우수한 혈통끼리 맺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이 밤을 지내는 횟수 또한 우수혈통은 열등한 혈통에 비해 더 빈번하고 긴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열등한 집단의 아이나 장애아가 태어날 경우 그 아이는 유기해 죽게 만든다. 아이의 엄마에게는 아이가 탁아소에 보내진 걸로 속인다.
그의 생각은 우수한 인재는 우수한 혈통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우생학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스 문화에서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문명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그들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영웅은 대부분이 제우스의 아들이거나 손자이다. 당시로서 최고의 혈통은 신들의 왕 제우스의 혈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는 신의 지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페르세우스의 후손인 알크메네와의 잠자리를 통해 얻은 아들이다. 헤라클레스는 죽은 뒤 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도리스 족의 시조신이기도 하다. 그는 사자 가죽을 걸치고 몽둥이를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스의 또 다른 영웅이자 하늘의 쌍둥이 별자리의 주인공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도 제우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바로 제우스와 레다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영화 ‘타이탄의 분노’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페르세우스 또한 최고의 혈통인 제우스의 아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는 아르고스 국왕 아크리시우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우스는 손자의 손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다나에를 청동 탑에 가두지만 운명을 막지 못했다. 탑 안에 갇힌 다나에에 반한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해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 결실로 낳은 아이가 바로 페르세우스다.
페르세우스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메두사의 목을 베고, 바다 괴물에게 바쳐진 안드로메다를 구해 미케나이의 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렇게 그리스 신화들은 최고의 영웅에게 최고의 혈통을 부여했다. 그들이 바라본 영웅의 자격이다.
고대인들의 우생학적인 사고는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에 있었다. 뛰어난 인간은 좋은 혈통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고대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구도에서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우생학이 실제 극단적으로 나타난 고대국가가 스파르타이다.
그들은 열성인 아이가 태어나면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한다. 스파르타에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건강한 신체조건이었다. 이를 위해 스파르타는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건장한 청년들에게 자신의 아내와의 동침까지도 허용했다.
또한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훌륭한 군인으로 성장할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스파르타의 여성들에게 운동이 권장되고 전투 훈련에 참여하게 한 것도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신체를 단련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여성들이 가임연령이 지나고 나서야 신체훈련을 중단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강건한 전사를 출산하는데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은 크세노폰과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건강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도 아이에게는 또 다른 관문이 남아 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원로원으로 데려가 아이의 건강 상태를 검사받는다. 이 검사가 아이의 생존을 결정한다. 건강한 아이라면 전사로 키워질 것이고, 약한 아이라면 내다 버려지는 것이다.
이러게 고대부터 시작된 우생학은 꾸준히 소멸되지 않고 내려오다 20세기를 전후해 다시 극대화된다. 흔히 우생학이 극에 달한 시점을 나치 시절로 생각하지만 사실 더 지독한 우생학적 차별이 존재했다.
180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는 우생학 열풍이 불었다. 여러 학자들은 그들의 차별적인 분리주의를 우생학으로 포장했다. 그들은 인종으로 구분하고 경제력으로 구분하고 사회적 지위로 구분하면서 우생학을 근거로 들었다. 가난이란 타고난 ‘기질’이라고 단정 지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정치인들조차 사회적 실업을 타고난 나태로 돌렸다. 그러면서 가난은 계급 불평등이 아닌 열등한 혈통 때문이라며 이들에 대한 추방과 출산 제한까지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은 차별적인 이민법을 만들었다.
미국 사회에서 시작된 우생학적 차별은 이후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서구에서 ‘열등한 유전인자를 가졌다’는 굴레를 씌워 수백만 명을 거세했다.
6년의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에서만 최소 3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에서는 전선에서 전사한 군인처럼 교전 중에 불가피하게 피해를 입은 이들에 더해,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 선천적 장애인 등을 단지 혐오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히틀러는 인류사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최고 책임자다. 지금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치의 의한 끔찍한 학살은 앤서니 퀸이 주연한 영화 <25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학살의 이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미국에서 유행했던 우생학의 부활을 다룬 것이다. 이 영화는 게오르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루마니아의 촌부 요한이 유대인으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오며 시작된다.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한 요한은 다시 붙잡혀 군수공장으로 보내진다. 그런데 어느날 독일의 친위대 장교가 그를 아리안 족의 순수혈통으로 선언해버린다. 이 선언으로 그는 혈통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 독일의 영웅이 된다. 그 근거는 그의 머리 둘레가 아리안족을 모범형이라는 것이다.
골상학 역시 두개골과 두뇌의 모양이 개인의 성격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우생학’이나 ‘골상학’ 모두 인종청소를 통해 이상사회를 만들자는 사람들의 이론적 토대다.
영화 <25시>에서 요한을 아리안족으로 판정한 과학적 근거는 사실 없다. 그저 줄자 하나가 모든 기준이었다. 그들은 과학에 대한 믿음은 컸지만 그것이 가져올 어두운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독일에서의 우생학은 스파르타에서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독일은 우월한 혈통의 유지를 위해 아기 공장까지 만들었다. 아리아인, 그중에서도 게르만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인식에서 강력한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레벤스보른’이다.
일종의 아기공장이다. 이곳에서는 독일인 여성들이 순수혈통을 출산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쏟아 부었다. 초기에는 독일인 여성장교와 독일의 미혼모 등을 대상으로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이후엔 유럽 각지에서 골상학을 기초로 여성들을 납치했다. 외모가 아름답고 머리 골격이나 두상의 형태가 게르만족과 유사하면 ‘레벤스보른’에 감금해 강제로 임신을 시켰다.
그곳에 갇힌 여성들은 네 명의 아이를 출산해야 그곳을 나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다. 그 아기들은 스파르타에서처럼 감별과정을 거쳐야했다. 의사가 보기에 질병이나 장애가 있다고 판단되면 아기는 죽음을 맞게 된다.
여기서 살아남은 아이는 순수게르만족임을 증명하는 혈통증명서와 함께 키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1만 5천명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히틀러가 만족하지 못하자 나치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점령국에서 게르만족과 외모가 비슷한 아이들을 납치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레벤스보른’으로 와서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출생증명서를 위조했다. 이들에 의해 납치된 아이들은 대략 2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레벤스보른’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비과학적으로 판명이 난 우생학은 사그라질지 않았다. 오히려 왜곡된 정보로 더 열광하기까지 했다.
그 사례로 미국의 '후손 선택을 위한 저장고'라는 이름의 정자 은행이 대표적이다. 설립자 우생학 신봉자인 로버트 그레이엄은 최고의 두뇌를 가진 부모 밑에서 최고의 아이가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은행이 설립된 지 얼마 후 미국의 월간지 ‘마더 존스’가 1983년 표지인물로 한 아이가 선택되었다. 도론 블레이크라는 아이였다. 박사 학위 가진 40세 심리학자 애프턴 블레이크와 28번이라 불리는 노벨 수상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아이의 아이큐는 180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천재아기에 대한 열망으로 광풍이 불었다. 하지만 워낙 기준이 까다로워 단 20명의 아이만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로버트 그레이엄이 죽고 이 정자은행을 통한 우생학이 사기였음이 밝혀졌다. 그의 ‘천재 공장’의 정자들 중 노벨상 수상자는 단 한명도 없고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정자였던 것이다.
도론 블레이크 역시 평범한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당시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지고 만다.
모자보건법 14조에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우생학적 장애라는 표현은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임에도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생학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유전자란 존재 자체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생명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신체와 건강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즉 유전자가 형질을 결정하니 좋은 형질은 좋은 유전자가, 나쁜 형질은 나쁜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논리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기도 하다.
과연 그럴까? 어느 유전자는 좋은 유전자, 어느 유전자는 나쁜 유전자 구분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다.
예를 들어 우울함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다고 치자. 이를 제거한다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울함이란 감정적인 동질감을 표현할 때도 쓰이는데 그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좋은 유전자라고 비타민 D 합성과 관련된 유전자를 강화한다면 알츠하이머가 나타날 수 있다.
이를 과학자들은 다면발현이라고 한다.
좋은 유전자만 가득한 세상은 과학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그동안의 이러한 시도들은 인간에게 엄청난 아픔을 안겼다.
피부색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장애 유무, 인종, 혹은 교육 수준이 다르다고 해서 그 유전자가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얼마 전 난민들에 대한 입장에서 한국 사회가 보인 편견은 우생학의 환생으로 보여 절망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일고 있는 페미니즘 논쟁, 다문화 사회에서의 왕따 현상 또한 한국 사회의 우생학적 편견들로 사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다름을 틀림으로 바라보거나 열등으로 바라보는 것은 스스로 잘못된 우생학의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