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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ul 31. 2019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실학'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1997년 유네스코는 한국의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렸다. 

‘수원화성’은 한국 고유 성곽이 가진 장점에 중국, 일본 등 주변 나라 성곽의 장점을 받아들여 쌓은 성이다. 이는 동아시아 성곽의 결정체로 보존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 성의 시설들은 이전의 성들이 가진 방어 기능에 추가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새로운 기능을 추가했다. 성의 모양에도 한국 고유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입혔다. 

눈여겨볼 것은 성곽 자체가 갖는 여러 특징적인 요소들에 한가지가 더 있다. 바로 축성과정에서 보여준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다. 정조는 기존의 설계를 바꿔가면서까지 민가의 훼손을 줄이고 주변의 산과 강, 마을과 잘 어우러지는 설계를 주문했다. 이는 정조의 세심함과 백성에 대한 애정을 말해준다. 

실제 기록에도 축성에 참여하는 백성들을 살피려는 노력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과중한 노동에 힘들어하지 않도록 날씨 상황에 따라 공사 기간을 조정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주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새로운 도시에 맞는 새로운 성, 이에 어울리는 통치문화를 세워 나라의 발전을 꾀했던 정조의 생각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이 수원화성이다.

그런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는 기존에 등재한 유산들과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유네스코 선정 위원회에 서류가 제출될 당시 수원화성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너진 것을 수리한 복원문화제였다. 그런 치명적인 결함에도 선정한 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유일하다. 

1975년 복원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수원화성, 수십 년의 역사밖에 갖지 못한 유물이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선정 이후 밝혀진 사실은 정조 때 수원화성의 축조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기술적 정밀함 때문이라고 한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훼손된 수원화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 『화성성역의궤』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기초석의 배치부터 돌을 들어 올리는 방법, 구조, 인력 배치 등 모든 것을 책을 참고했다. 

유네스코의 위원들도 처음엔 한국의 등재 신청에 논란이 많았지만, 이 의궤에 기록된 축성에 대한 세밀한 기록과 복원 과정을 보고 이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수원화성은 정조의 지시가 있고 난 뒤, 단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축성을 완료했다. 그 기간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면서도 일정에 무리가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공사 기간을 줄이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거중기(擧重機)라는 장치였다. 의궤에 기록된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그 힘을 극한까지 끌어냈다. 당시 중국이 개발한 것보다 4배 가까운 무게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성을 쌓는 과정에서도 시행착오 없이 원래의 설계대로 진행해 나갔다. 이는 치밀하고 실용적인 계획과 기술이 적용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거중기

이렇게 성의 축조와 거중기의 제작 등을 포함한 그 모든 증축 계획은 당시 실학자들의 연구 결과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실학

당시 다산은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수원화성에 쓰인 거중기 등의 기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기도설』은 독일의 선교사 ‘장 테렌츠’가 쓴 책이다. 이 책이 그의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정조의 힘이 컸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안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워 국내외의 많은 실용서를 수집하고 인재를 모았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서구문물의 유입과 함께 새로운 실용서들이 활발하게 들어오던 시기였다. 정조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4,000권 넘는 방대한 분량의 [고금도서집성]을 규장각에 두게 했다. [고금도서집성] 중 기중기 제작법이 실린 『기기도설』이 수원화성 축조에 큰 도움을 줬다.


정조가 이렇게 방대한 책을 모으고 인재를 데려온 것은 당시의 조선을 위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즉위하던 시기는 주자학 전통의 개혁 정신이 실종되고 명분과 이론으로만 치중한 정치권에 대한 절실한 개혁이 필요로 하던 때였다. 북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 수많은 분파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그들이 조선 후기 내내 벌인 당파싸움으로 조선은 심각한 병이 들었고, 결국, 개화와 발전마저 가로막았다. 


정조는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계를 견제하기 위해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과 서명선 등 소론까지 두루 중용했다. 또한, 젊은 관료들을 모아 규장각에서 왕이 직접 경서 공부를 시키고 시험을 보는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운용해 정약용, 서유구 등 인재를 길러냈다.


그의 개혁을 위한 준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일정 관직 이상 오르지 못했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까지 규장각에 들였다. 이들이 맡은 업무는 수집한 도서 연구하는 일이었다. 당시 심화해 있던 양반 사회의 차별 문화를 완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편 경제 분야에서는 일반 소상인도 자유로운 상거래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허가를 받은 시전상인들에게만 부여했던 ‘금난전권(禁亂廛權)’, 즉 난전을 금지하고,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폐지한 것이다. 


정조가 시도한 일련의 개혁은 당대 정치적 안정은 물론 문화의 번성을 가져왔다. 조선 중기 이후 실질을 중요하게 여기던 주자학 전통이 무시되고,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며 공리공담에 빠져들어 있던 사회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또한, 실용적인 면의 강조로 조선 건국 이후 과학 혁명을 불렀던 주자의 사상과 이후의 다양한 학문이 만나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꽃을 피우게 했다. 

다산 정약용

다산은 이전의 이런 흐름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데 있어 다른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 수원화성 축조에 보여줬던 것처럼 다산 정약용은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열린 사고를 했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개혁과 개방, 실학적 가치를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했고,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이런 그의 생각들은 저서를 통해 더욱 구체화하였다. 그가 저서를 통해 강조한 것은 어떤 학문이나 제도라도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이 문제가 있다면 그 취지는 퇴색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의 제도라도 시간이 지나면 폐단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가 예로 든 제도는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에 의해 시작된 사창(社倉)제도였다. 이 제도는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할 때 이자와 함께 거둬들이는 대표적인 진휼 제도였다. 그런데 이를 관리하는 자들이 빼돌리거나 관을 속이는 등의 농간을 부렸다. 대표적인 경우가 당시 백성들이 봄철 보릿고개 때 겨가 섞인 곡식을 대여받고, 온전한 곡식을 가을 추수 때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


다산은 이런 아전의 농간에 대해, 지독해서 불가에서 말하는 '아비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사창제도뿐 아니라 영조 때의 균역법이나, 광해군 때의 대동법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어떤 제도라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나, 마침내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봤다. 제도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지도자의 역량도 높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주자학에서의 인(仁)을 재해석한 결과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직되고 이론에 치우치게 된 주자학이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산은 인(仁)을 ‘사람의 일’로 풀이하고 있다. “어질 인(仁)은 사람을 뜻한다. 두 사람(二人)이 곧 인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인이다. 임금과 신하가 각각 본분을 다하는 게 인이고, 남편과 아내가 각기 본분을 다하면 곧 인이다. 인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긴다(仁之名 必生於二人之間).”라는 글에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주자학의 실학 전통


이렇게 다산의 실학은 사회와 제도의 개혁을 주자학의 근본정신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는 주자학에 대한 광범위한 고정관념이 존재하고 있다. 즉 주자학은 구시대의 사유 체계로서 서양 문화와 제도 유입을 바탕으로 이룩한 현대 한국에서는 더 재고할 가치가 없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20세기 전반기에 겪었던 일제 강점이라는 비극적 경험 때문에 주자학을 이러한 역사적 질곡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하며 더더욱 멀리 여기게 되었다. 

남송 주희의 초상

실제로 국정 고등학교교과서에서 보면 주자학을 비현실적 관념론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실학이라는 훌륭한 개혁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했고, 이 때문에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이나 일본의 유학자들 이상의 철학적 경지를 이루었던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같은 분들의 위대한 사상조차도 무지와 무관심 속에 역사 속으로 사장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퇴계와 이황처럼 조선의 양반들은 책이나 읽으며 소일했을 뿐 실질적인 사회 기여는 거의 없었다고 단정해버린다. 조선 성리학으로 일컬어지는 주자학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보다 한참 뒤처지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를 통해서 실재적인 근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조선 후기의 노론을 중심으로 한 일부 계층이 자신들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자학 사상을 이용하며 서양 문명을 배척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생각은 전체적으로 볼 때 큰 오해와 편견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 침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지어낸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한국인들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뒤처졌기에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해주었다’라는 논리다. 


그런데 정작 당시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의 교육과 문화적 전통, 그리고 조선 초기 지식인들과 실학자들의 높은 수준을 폭넓게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주자학 전통의 실학적 요소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를 일본 근대화의 뿌리로 두기도 한다. 

이런 주자학의 시조인 남송의 주희(朱熹)는 그의 사상이 단순히 공자의 도덕철학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주자학은 도덕철학과 함께 격물(格物), 즉 사물의 근본을 파고드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주자학은 형이상학의 학문이면서도 과학과 정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주자학은 한국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과학 발전을 막았던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 과학기술의 토대 역할을 했다. 조선 초기에 법전을 바탕으로 한 법치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과학기술 장려 및 한글 창제와 같은 눈부신 문화 발전을 가져온 것도 주자학을 새로 국가의 사상으로 받아들인 효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초기는 외래 사상과 문화의 적극적 수용과 소화 과정을 통해 주자학적 질서를 성립시키는 시기였다. 그 위에서 진경문화를 창출하여 개성적 전통문화를 완성했다. 그 전통이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인 정조 때 실학으로 부활했다. 

당시 정약용을 포함한 학자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당대의 학자들이 두루 사용한 폭 넓은 개념의 학문의 전통을 살리고자 했다. 또한 경전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국가 경영 혹은 민생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 같은 움직임, 사상이 바로 실학이다. 


철학의 집대성자, 다산


다산은 실학을 통해 사회의 근본부터 개혁하길 원했다. 그는 당시 사회가 너무나 썩고 부패해서 일초일목, 사람뿐만 아니라 초목까지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저서를 보면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다.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다산의 비장함마저 느낄 수 있다. 

조선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고 살리려면 학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깨우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산은 60대에 들어 생의 마지막까지 15년 정도를 스스로 사암(俟菴)이란 호를 가지고 살았다. 여기에서 사란 기다릴 사(俟)자다. 훗날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시대에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후세 누군가가 자신의 책을 보고 그것이 현실 타계의 가장 적절한 방안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랐다. 또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원리라는 것과 이것을 수용해서 잘 발전시켜줄 것을 기대했다. 이런 기대를 담고 있었던 것은 중앙정치에서 내쳐진 당시 그의 현실에서는 자신의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너져가던 조선 왕조가 잠시나마 실학의 영향으로 다양한 기술 발전을 이루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의 전통으로 돌아가 초심을 강조했던 것처럼 주자학 전통의 초심을 회복하고 다양한 학문과의 결합의 산물인 실학. 그러한 실학이 대세가 되었던 영·정조 시대에는 당시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이었던 농업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고, 생산량 역시 많이 증가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장이 활성화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는 등 초기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조선 초기 과학기술의 발달에 비해 성장이 더뎠던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술의 발달로 이어졌고 당시 사회 전반에 확산했다. 과거보다 노동량은 줄고, 부를 쌓는 농민도 적지않게 나타났다. 농사에서 벗어나 상·공업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도 늘었다. 이는 이전까지 단단하기만 했던 신분 차별의 벽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인간성의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러한 실학의 가능성을 확인한 다산으로서는 가능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실학을 완성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중앙 정치무대에 있을 때나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가장 큰 후견인이었던 정조가 49세로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문벌에 의한 세도정치가 등장했다. 이는 그의 긴 유배 생활의 시련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정약용은 학문에 몰두하며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에 따른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 그의 생각을 정리해 책으로 남겼다. 그는 저서 『경세유표』를 통해 통치, 상업, 국방 중심의 도시건설과 토지 개혁을 바탕으로 한 세제, 신분 등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 개발을 해야 한다는 국가개혁사상을 세웠다. 또한 『목민심서』를 통해서는 목민관으로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는 방법에 대해 역설했다. 

다산박물관에 전시된 목민심서

방대한 저작을 통해 최고의 실학자가 된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업적은 경집 232권, 문집 267권 등 499권에 달한다. 503권의 [여유당집]이 바고 그것이다. 

다산의 위대함은 주자학, 서학, 고대 유학 등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면서도 어떤 경향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데 있다. 그래서 다산을 단순히 ‘실학의 집대성자’가 아니라 ‘철학의 집대성자’로 부르는 것이 맞다.


그는 아무리 훌륭한 계획과 구상이라도 실제 현실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무의미한 주장을 거부했다. 아주 실제로 현실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에 제도를 만들고,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다산의 나라를 구하려는 방안이었다. 다산은 이렇게 실제적인 개혁을 모았고, 그것의 당위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에는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애정이 늘 드러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고 실천했던 양심적인 지식인 다산 정약용, 그의 정신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세계 정신의 중심


오늘날 한국 사회는 예전의 중국, 일본 등 몇몇 국가를 넘어선 전 세계와 마주해야 한다. 1970년대 한국이 근대화와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한 지도자의 힘이 아니다. 물론 운도 아니다.

그것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충분히 포용하고도 남는 주자학의 광대하고 심오한 정신문명과 시대를 알고 바로잡으려는 실학의 전통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주자학이 정신문화의 기초로 자리 잡아 온 한국과 중국, 일본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의 대열에 들어서 있다. 한국은 이에 더해 주자학의 실용 정신과 실학의 정신, 서양 과학기술이 성공적으로 접목한 독특한 경우다.


현대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믿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한 전제는 그동안 쌓아온 성공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파고들어 가 보면 마냥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가올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새로운 글로벌 사회를 선도할 사상의 시작점이 한국의 전통 사상이라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실학 이전의 조선 중기의 타성과 실학 이후 집권 세력의 서양 학문과 문물 배척이 그 원인이다. 이런 것까지 긍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것을 근거로 한국이 조선 시대에 쌓아 올렸던 모든 주자학의 학문적 성과와 실용 정신을 살린 실학, 그 밖의 한국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학문을 부정하고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린다면 그 손해는 자신들에게 돌아갈 뿐이다. 


한국인이 조선 개국 이후 함께해 온 학문 전통을 쓸모없는 것이라 여긴다면 조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 적지 않은 유서 깊은 조선의 지혜는 오늘날의 한국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잠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을 지나오며 이를 충분히 경험했다.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한국인이 조선의 전통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미래를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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