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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라봉 Apr 08. 2024

어른들과 놀이하는 것이 익숙한 아이들,

특히 코로나베이비 20년, 21년생들의 이야기

우리 아이는 20년생, 코로나가 발발한 2020년에 태어난 아이다. 지금은 2024년, 코로나가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가고 있지만 첫 아이를 낳아야 하는 그 시기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었다.


코로나베이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무거운 주제 '저출생'을 꺼내본다.




코로나와 저출생 상관관계는 사실상 개연성이 낮고 그 사이에 수많은 변수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관련 연구자료를 살펴보았을 때, 코로나는 가임기 청년 및 임신한 여성의 치사율이 높지 않으므로 주요 요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는 재난처럼 사회적 구분 없이 불특정 다수가 위험에 빠지는 질병이 아니기에 학술적으로는 가능한 설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20년도에 아이를 낳은 사람으로서, 코로나는 출생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정량적으로 측정은 안되어도, 정성적으로는 충분히 육아의 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아이의 또래는 자녀가 한 명인 가정도 참 많다. 물론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사회적으로 격리된 채로 출산이나 육아에서 어려움을 느꼈다면 둘째를 갖는 것(시도함)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코로나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의 특징으로, 영유아기에 감염예방 측면에서 확실히 검증된(?) 어른들만, 그것도 한정적인 공간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일 수도 없었거니와 불특정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또는 다수의 사람이 다니는 공간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상상을 하지 못했다. 문화센터 수업이나 아이들이 모이는 프로그램도 전면 중단된 시기이니까.


때문에 아이들은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질 영유아기에 성인 1명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또는 어떤 미디어에서 만나는 (실제, 가상의, 캐릭터) 사람정도였다. 우리 아이도 그랬다. 특히 생후 12개월까지는 또래 친구들은 더더욱 만나지 못했다. 물론 돌 전 시기에는 친구 관계를 형성하거나 인지할 수 없는 시기라지만, 양육자가 아닌 다른 람을 아예 못 보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간혹 접종 또는 정기검진 시기에 병원에서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보긴 했지만 일부의 시간일 뿐이다. 그조차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만났으니 안타깝지 않은가? 아이도 안타깝고 그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어른도 안타깝다. 사실 주 양육자인 어른 1명 또는 2명이 아이의 24시간을 보는 일은 참 고된 일인데, 그 에너지가 회복되기도 전에 어른도 아이도 지쳐버리기 딱 좋은 환경이다. 아프리카 속담의 '한 아이를 기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과는 가장 반대의 상황으로 치닫았다고 본다.


어른 1명과 아이가 같이 성장하는 환경을 생각해 보자. 우선 또래로부터 습득할 수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기회가 사라진다. 또한 어떤 과정을 다 알고 있는 어른 옆에서 만들어진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친다. 이때 어른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제공자이며 놀아주거나, 맞춰주는 한 사람이다. 또는 어떤 규칙을 끊임없이 나열하는 사람이겠지 싶다. 생각해 보면 시시 탐탐 바라보고 있는 성인 1명이 있다는 건 아이들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아이도 그 시기 내 옆에서 진정 원하는 놀이를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 이 환경에선 아이는 양육자에게 의존도가 높아지기 쉽다. 어쨌든 어른들이 아이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신체적 자유도가 높으니 있는 힘껏 울어버리거나 애교로 살살 녹이면 안 되는 일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성인 1명은 한 아이를 위한 기준과 방법으로 맞춤형 성장을 돕는 역할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아이들은 참 영악하다. 어른들을 움직일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저출생으로 시작해서 아이의 양육자(어른) 의존도가 높아지는 내용까지 써내려 왔다. 이런 상황은 사실, 아이와 주 양육자인 성인이 코로나 시국에서 주어진 삶에 열심히 적응한 죄 밖에 없다. 그런 세상에서 자라온 결과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듯, 1-2년 전부터 외부 활동과 단체 활동의 경험도 주어지고 있지만, 육아 첫 단추를 코로나(격리생활)로 겪은 양육자들은 그 차가운 시기를 오롯이 견뎌내고 이제야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의 시도로 이번 주말 우리 아이 또래 친구들이 있는 세 가족이 모여 캠핑 다녀왔다. 엄마인 나의 동창 가족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고 출산했는데, 이제야 서로 부담 갖지 않고 만나자고 한다. 그동안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조심스러워 서로의 안부만 물었을 뿐인데 말이다. (같이 만났다가 누구라도 코로나에 걸렸다하면, 독박육아 또는 난처해질 맞벌이 부부의 모습이 그려졌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낯을 가려 각자의 놀이로 만남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덕분에 어른들도 캠핑 준비로 분주하다. 아이들이 비로소 엄마나 아빠를 찾지 않고 그들끼리 노는 것을 보니 얼마나 기특하고 기쁜지 모른다. 놀이하면 항상 부모를 찾았던 아이들도 이렇게나 잘 놀 수 있는데, 그동안 그 기회를 못 만들어준 것이 내심 아쉽다.



우리 아이 유치원 끝나고 아이들이 많은 태권도 학원에 보내게 된 것도, 나의 육아휴직을 통해 해가 떠 있는 밝은 시간대에 하원을 도보로 하는 것도 그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대체로 아이들이 많은 시간에 놀이터나 그 외부 활동을 하면, 또래 친구들과의 유대를 경험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또래 친구들과의 시간으로 재미를 채우길 바란다.


처음 이야기 꺼냈던 '저출생'과 코로나베이비의 이야기에 대한 짧은 소견으로는, 아이와 양육자와의 시간을 '따로 또 같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육아 세상이 한결 더 편안해지고 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아이 한 명을 기르는 육아 가정이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시간 확보 그리고 그 마음이 우선 선행되길 바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도 분명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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