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윈픽스의 빗치 Oct 14. 2019

구황작물 연애담

2019.10.07.월


글을 미친듯이 쓰고 싶은데, 요즘 들어 단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나의 게으름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끊김 없이 이어나가고 잡힐 것 같다가 도망가버리는 문장을 붙잡는 데에는 꽤나 귀찮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지지부진한 과정을 시작할 힘도, 끝낼 힘도 요즘의 나에겐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괜히 했던 사소한 다짐 때문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도 기승전 연애, 기승전 사랑인 글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떠난 타인과 함께 비축해 둔 과거의 기억을 구황작물처럼 파먹으며 연명하는 그런 글은 더 이상 안 쓰고 싶었다. 나한텐 구구절절할 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겐 그냥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일기일 뿐인 글. 일기를 남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달난 관종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소했던 다짐을 쓸데없이 잘 지킨 결과, 나는 보고서 쓸 때 말고는 자판을 하나도 두드리지 않고 퇴근 후 시간이 남으면 맥주나 따는 무미건조한 현대인이 됐다. 올해 초 내근을 시작하면서의 마음가짐이라면 벌써 희대의 역작 하나는 나왔어야 하는데, 써 놓은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글 쓰는 게 더 무서워졌고 외면하고 싶었다.


서른이 되면 웬만한 산전수전은 좀 겪어본 ‘언니’가 돼 있을 줄 알았다. 살아있는 이야기보따리 같은 사람이 돼 있을 줄 알았다. 몸 속에 재미있고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찰랑찰랑 차 있는데도 예의와 염치를 알아서 입은 무거운 그런 멋진 어른이 돼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의 나는 할 이야기가 고작 지난 연애뿐인 사람이다. 지난 사랑 이야기를 안 쓰자니 글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쩌다 좀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했다 싶을 때 이리저리 끼적여봤지만 연애 이야기 아닌 글은 10줄을 채 넘지 못했다. 이런데 무슨 장래희망이 소설가야. 텔링할 스토리가 없는 스토리텔러도 있나.




이대로 우울에 빠졌다간 영원히 기자나 하다가 죽을 것 같아서 생각을 좀 틀어보기로 했다. ‘왜 연애담 말고는 글을 못 쓰는가’ 말고, ‘연애담을 써도 좋은(괜찮은) 이유를 찾아보자’로.


사실,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주제로 선택하는 게 사랑얘기다.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언뜻 지질하기까지 한 사랑타령을 한다. 지금 당장 멜론 인기차트 1위부터 10위까지만 봐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구구절절하다. 그게 아무리 식상해도 아무튼 잘 먹히기 때문이다.


좀 부끄럽지만 교과서에서 백제 가요 ‘정읍사’를 처음 본 날 많이 울었다. 가사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한 줄 한 줄 안에 아직 귀가하지 않은 배우자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 시대에 살아본 적도 없고 배우자가 있어본 적도 없지만, 하다못해 달한테까지 상대방의 안녕을 비는 그 간절함은 1000년 후의 사람까지 울릴만큼 보편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리 기다려도 새벽까지 연락이 없던 썸남의 문자가 오기를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께 빌던 그 때의 내 신세가 겹쳐보여서 훅 꽂혀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의 연애담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지만 또 끝도 없이 보편적이다. 그 순간의 공기가 모두 다르고, 못 잊는 말 한 마디가 모두 다르다. 내 사랑만 더럽게 힘들고, 그 쓰라린 사랑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우연히 어떤 사랑노래를 듣게 된다. 아무리 들어도 저건 나와 그 사람의 이야기다. ‘어머 내 맘 속에 들어갔다왔나봐’ 하며 가사를 무한히 곱씹는다. 근데 그렇게 그 노래를 무한재생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5000만이다. 모두가 자기 이어폰 속에서 같은 노래를 들으며, 서로 다른 순간을 떠올린다. 사실은 SPA 기성품인데 나만을 위한 맞춤옷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는 게 연애담이다. 그걸 파는 것은 어쩜 가장 약삭빠르고도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특히, 내 또래의 사람들이 글을 쓰면 사랑 이야기를 많이 쓰는데, 아마 짧은 인생에서 다른 사람과 감정을 그만큼 깊게 나눠봤던 경험은 연애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어떤 것을 주제로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같은 콘텐츠를 제작하려면 그 대상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그 대상을 오랫동안 지켜봐야 한다. 나름의 통찰력을 갖게 되면 그게 콘텐츠를 만드는 추진력이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매일매일 출퇴근 열차에 끼어타는 평탄한 30년 인생 가운데, 그만큼 애정을 갖고 고뇌해 본 것이 연애 말고 또 있을까. 이야기 소재의 빈약함은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결핍인데, 그걸 알면서도 괜히 스스로를 질책해 의지마저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예나 지금이나 교생선생님이 처음 교실에 오면 아이들은 꼭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연애담에 대한 수요는 시대와 세대를 넘나든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게 일기같은 연애담 뿐이더라도 그냥 꾸준히 써보려 한다. 근데, 솔직히 글은 연애담을 써야 제맛이다. 좀 지질하고 구차해야 읽는 사람도 재미가 나지. 안 그런가.

매거진의 이전글 산산조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