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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r 05. 2020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삐

2020.03.04

코로나 때문에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 구내 식당이 이제는 마주보고 앉는 것도 금지했다.
밥을 먹으며 앞 사람에게 침이 튈까봐 한 칸 걸러 한 칸마다 착석금지 푯말을 붙여놓았다. 사람들은 일행끼리 와도 지그재그로 앉아 정면 빈 자리를 바라보며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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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때문이라 사실 씁쓸한 광경이지만 나는 이런 방식이 꽤 좋았다.
예전부터 맞은 편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앞 사람의 다리를 신발로 툭툭 건드리는 사람이 싫었는데
오늘은 그럴 일이 없어서 행복했기 때문이다.
착석금지석이 만들어진 구내식당은 프로불편러인 나를 불편하게 하는 여러 가지 '침범'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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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화의 침범
진심을 다해 말을 하고 있는데 뚝 끊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싫다.
내가 대화를 요청했는데 정작 내 용건보다 자기 용건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 싫다. 다 듣고나면 가끔 내 용건이 뭐였는지 싹 잊어버린다.
결론이 나지 않는 질문을 던져놓고 나더러 무언가 끊임없이 결정하게 하는 사람이 싫다. 열심히 말해줘봤자 그 사람들은 결국 진심어린 내 대답을 듣지 않는다.
자기가 말을 할 때는 주목을 강요하지만, 남이 말을 할 때는 딴 짓을 하는 사람이 싫다.
일전에 내가 말했던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거나 내가 말했던 것을 마치 새로운 아이디어인양 갖다 파는 것도 싫다. 그냥 기억력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아. 침묵하고 싶을 때 그 적막을 억지로 깨는 것도 참을 수 없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다. (실제로 억지로 말을 많이 하면 횡경막을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대화는 여러 사람이 차례를 지켜가며 경청하는 건데 그 기본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또 가끔은 침묵도 대화라는 사실도 너무 쉽게 간과한다. 이런 이들과는 말도 섞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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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건의 침범
어릴 때부터 책을 빌려달라는 부탁은 열에 아홉 거절한다. 한 장 한 장 닳을까봐 유물 넘기듯 책을 읽는 나는 내 책이 남의 손을 타는 게 싫다.
학교에 다닐 때는 내 볼펜을 빌려가는 친구들도 싫었다. 특히 필통 좀 봐도 되냐고 하며 내 필기구를 들쑤시는 거. 빌려 간 펜의 촉을 망가뜨린 채 돌려주는 것은 최악이다. (특히 하이테크)
어른이 되어서 만난 사람들 중에도 다른 이의 물건을 허락 없이 만지는 사람이 많은데, 다들 나를 무척이나 피곤하게 한다.
갑자기 내 가방 안을 뒤진다거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물건을 함부로 가져다 쓰는 거. 아, 손민수 짓도 정말 싫다. 내 물건은 내 취향의 반영인데 그걸 따라하는 건 내 취향까지 침범하는 거다. (길거리에서 비슷한 톤으로 상하의 맞춰입은 사람 보면 난 도망간다.)
물건에 대한 예의를 침범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참다못해 내 물건 좀 소중히 다뤄달라고 요청이라도 할라하면 그들은 대부분 어이가 없다는 듯 "똑같은 물건 또 있잖아. 내가 다시 사 줄게. 무슨 호들갑?" 이런다. 은교도 못 봤나? 내 물건이 되는 순간 그 거울은 그냥 거울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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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간의 침범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나는 하루에 최소 한 번 씩은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씩은 예의와 거리를 지키지 않는 누군가에게 항의를 한다.
요즘은 1.5석 씩 차지하는 패딩 돼지들에 대한 울분이 하늘 끝까지 차 있다. 각 좌석 사이에 철판같은 걸 대서 한 사람이 좌석 한 칸 공간만 차지하게끔 했으면 좋겠다.
자기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발 가는대로 옆걸음, 뒷걸음질을 치다가 주변 사람 발을 밟거나 사람들이 지나가야 할 길목, 특히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리는 곳 앞에 떡하니 서서 길막하는 것도 참을 수 없다. 자기가 한 번 설정한 경로는 절대로 이탈할 수 없는지 앞에 사람이 오는데도 1도 양보하지 않고 세차게 걸어와 몸을 부딪히는 것도 싫다. 적어도 성인이라면 자기로부터 반경 30센티 정도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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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도 착석금지 푯말이 필요하다.
내 허락 없이 맞은 편에 앉아서 다리꼬고 앉지 말라고 금지 푯말을 만들어 써붙이고 싶다.
물론 오늘의 구내식당처럼 한 공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훨씬 줄어들겠지. 장사가 절반은 잘 안 될 거다.
그래도 난 너무 많은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것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소수정예 관계만 유지하는 편이 좋다.
내가 지나치게 까칠한 건가? 그냥 최소한의 예의를 바랄 뿐이다.
사람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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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곡: 아이유 <삐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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