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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06. 2020

베스트 프렌드

2020.5.4.

 토마스가 나를 두고 그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말했을 때, 나는 거의 청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정말로 청혼을 받으면 기쁠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 그렇게 표현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레서 계속 곱씹고 잠까지 설칠 정도로 행복했던 것은 단순히 내가 누군가의 베스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한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큰 흔적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는 약간은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을까?

 사실, 남녀사이로 본다면 ‘베프’라는 것은 일종의 사형선고일 수 있다. 친구 이상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선 긋기. 하지만 나는 항상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연애라는 일차원적 관계는 유효기간이 지나고 나면 다음 차원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곁에 두고 싶을 만큼 탐났던 사람들이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 연애 중에는 그들 대부분이 ‘헤어지더라도 꼭 친구로 남자’는 나의 제안에 동의했지만 헤어진 뒤에는 흔적도 없이 약속을 파기했다. 진정한 친구로 남은 연인은 아무도 없다. 내 연애의 끝은 모두 잃어버림이었다.

 토마스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성별로 태어난 나 같을 때가 있다. 갤러리와 짬뽕을 싫어하고 문학을 읽지 않는 정반대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뻔뻔하게 춤을 추고 방탈출을 좋아하며 한참 연락이 끊기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그런 흔치 않은 취향을 공유하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mbti 성향도 똑같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토마스가 나랑도 누구랑도 결혼하지 않고 그냥 죽을 때까지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왔다. 나와의 사이에서 결혼이라는 사회보편적인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결혼이라는 사회보편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대안처럼 찾아 떠나지 않는 사람. 토마스는 그랬으면 했다.

 연애의 과정들을 다 지났지만 이번엔 다르다. 토마스의 베프 고백을 듣고 기뻤던 이유는 연애의 끝이 꼭 잃어버림은 아니라는 내 믿음을 타인이 확인해줬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그 타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토마스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서로를 만지고 싶어서 안달 난 뜨거운 관계이기보다는, 서로가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을 믿는 미지근한 관계다. 물을 끼얹으면 꺼져버리는 불이기보다는,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유지되는 체온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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