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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23. 2020

퇴사는 실연같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2020년 5월 31일. 내 인생 첫 회사의 퇴사를 앞두고 있다.

 퇴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얼굴이 좋아졌다, 표정이 밝아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실제로 나는 많이 행복하고 평온하다.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떨림이 없고 후회도 되지 않는 걸 보면 이건 적절한 때에 내린 적절한 결정이 분명하단 생각이 든다.


 6년을 버티는 동안 여러 번 퇴사를 결정한 적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크게 세 번이다.

 첫 번째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경찰서에서 먹고 자던 수습 기간. 열악한 2진 기자실마저도 가득 차서 경찰서 로비 민원인 의자에 쪼그려 누워 하루 10분을 잤다. 당직을 서던 형사들이 나와서 이런 데서 자면 얼어 죽는다고 날 깨웠었다. 21세기에 동상이 걸리고 매일같이 몸 어딘가가 탈이 나면서까지 이 일을 하고 싶은 건 아니라는 걸 일찍 깨달았었다. 퇴사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허리디스크를 덤으로 얻었다.

 두 번째는 사건팀 이후 처음 발령 받은 부서에서 근무할 때였다. 내 시간이 노트북과 핸드폰에 잠식당하는 인생을 그만 살고 싶어 사직서를 냈다. 회사에서 받은 노트북을 반납까지 했는데 후련함보다 후회가 더 크다는 걸 느끼고 다시 노트북을 받아왔다.

 세 번째는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던 같은 부서에서 신문 기사와 방송 기사를 동시에 마감하며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도 수시로 상사의 전화를 받아야 했던 때.  그만 두겠다고 후배에게 넌지시 말을 했었는데 후배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불발됐다.


 이렇게 세 번은 정식으로 외부에 퇴사 의사를 밝혔던 경우고, '이놈의 회사 관둬야지' 하는 말은 하루에도 최소 다섯 번은 해 왔다. 얼마나 입버릇처럼 말했으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너는 분명 정년퇴직 할 거라고 놀리던 동기도 있었다. (내가 뭐랬어 퇴사 할거랬지)




 나는 내 생각보다 첫 회사를 사랑했었다.

 회사 생활이 내 생각처럼 안 되는 데 대한 답답함과 안타까움 때문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건 회사에 대한 애정이 뜨거웠다는 반증이었다. 연인과의 이별을 마음먹다가도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면 말짱도루묵이 되는 것처럼, 너무 괴로울 때마다 나는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늦게까지 현장을 지키거나, 기사를 마감하거나, 야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고요한 밤이면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왠지 모를 자부심도 느껴졌다. 온갖 욕을 해 가면서 취재하고 마감하고 나면 현타가 오지만 다음날 아침 전국으로 배달되는 신문에 내 이름이 달린 기사가 실려 있는 걸보면 그래도 조금 더 버틸 힘이 생겼다.


 이전에 사직서를 냈었을 때는 퇴사 결정을 내렸다가도 이런 생각들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러면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려와서 사직서 처리 데드라인까지 하루하루가 지옥같았다. 이번엔 마치 부처가 된 것마냥 평안하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평화로운 중에도 많이 슬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이놈의 회사, 그만둬버려야지. 그동안 쏟은 정성이 아깝다!' 였다면 지금은 '안녕, 어찌됐든 그동안 고마웠어. 내가 걱정할 필요 1도 없겠지만 그래도 잘 지내야 해'의 느낌이랄까.


 후회는 없지만 슬픈, 이 모순된 감정의 레퍼런스를 찾다보니 이건 딱 오래 만난 연인이랑 헤어질 때 느꼈던 실연의 감정이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나는 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가끔 충돌이 있어도 내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면 어김없이 상대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외려 한 번 결심하면 헤어지는 게 쉬웠다. 내 한계까지 해봤는데도 둘 사이에 미래가 안 보인다면 아쉽지만 그건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6년동안 거의 매일 만났던 회사와의 이별을 결정했고, 생각보다 이 실연이 힘들지는 않지만 좀 슬프다.


 나보다 2년 먼저 퇴사한 동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동기는 광화문을 지나갈 일이 있어도 일부러 회사 건물을 안 쳐다보게 되더라고 했다. 회사가 징글징글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못 쳐다보겠다는 거다. 헤이즈의 명곡 '비도 오고 그래서'에 나오는 '우산 속에 숨어서 네 집을 지나쳐'란 가사가 그 기분일 것 같다. 그 동기 역시 나처럼 퇴사를 실연처럼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실연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환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듯이, 나도 사직서를 제출하기 한 달 전 쯤 이력서를 작성했었다. 학교 선배의 이직 제안에 쓰기 시작한 이력서였는데 쓰다보니 서른 살 손가인의 인생을 한 번 갈무리 하는 것 같아 시간가는 줄 몰랐던 재밌는 경험이었다. 선배의 제안은 불발되는 듯 보이지만 덕분에 이력서 하나를 완성했고 그걸 리크루트 사이트에 시험삼아 올려봤다.


 결과는 놀라웠다. 헤드헌터는 물론 다른 기업 인하우스 담당자들에게서 쏠쏠하게 연락이 왔다. 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나 팀장 자리를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고 연봉 1억을 제안하는 곳도 있었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은 기사 쓰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는 데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나의 환승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사 쓰는 일 외에 브랜딩 기획까지 경험해 보게 해 준 이 회사에 더 고마움을 느끼게 했고, 또 더 역설적으로 퇴사 결심을 더욱 굳히게 했다. 퇴사를 생각하면서 가장 걱정됐던 게 (바보같이) 돈이었는데 굳이 이 회사에 있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 없겠구나 하고 용기를 내게 해 줬다.


 하지만 당분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면 나쁘지 않았던 엑스에게 다시 돌아가지 굳이 새로운 연인을 힘들여 찾고 싶지 않다. (1억을 주면 1억원어치의 스트레스를 함께 주겠지)

 또, 회사의 이름이나 직업의 이름과 함께 있어야 정의되고 인정받는 손가인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내 이름 석 자로도 온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동아일보와 기자라는 이름이 줬던 경험들은 사회초년생이 어디서도 못 해 볼 값진 것들이었지만, 초대 받은 행사에 마련된 내 자리에 '손가인'이 아닌 '동아일보'가 적혀 있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대상과의 이별은 깔끔하다. 그리고 이 상쾌한 기분으로 제주도에 가서 잠깐이나마 살아 볼 계획을 짜고 있다. 그 뒤의 계획도 실행은 하고 있지만 일단은 이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가장 큰 걱정은 제주도 가는 날 태풍이 오면 안되는데 하는, 천재지변 뭐 그런 거다.


20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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