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신에게 점수를 구한다.
“하나님, 제발 이번엔 잘 보게 해주세요.”
이 문장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지만, 나는 늘 의문이 든다.
신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판기인가, 아니면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인가.
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순간,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
기도의 본질은 바람이 아니라 변화인데,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잊은 채 결과만을 구한다.
생각해보면 수능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대학교 하나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은 허상이다.
인생은 대학보다 훨씬 큰 우연과 선택의 연속으로 흘러간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생각을 품으며, 어떤 시련을 겪는지가 우리를 바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학 이름에 자신의 가치를 걸고, 신에게 그것을 달라고 매달린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 욕망의 포장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불안할 때마다 신에게 이유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그 기도 속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부모의 불안’이었다.
좋은 대학을 향한 열망은 자녀의 욕심이 아니라, 대개 부모의 욕심이다.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빌며 기도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체면과 불안을 달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야 내가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는 듯”
그 마음 안에 신은 없고, 오직 사회의 시선만 남는다.
신은 인간의 성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욕심을 비추어 보게 하는 존재다.
진짜 기도는 “이루어주세요”가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고백이어야 한다.
신을 도구로 삼을수록 인간은 자신을 잃고, 신을 목적으로 바라볼수록 인간은 자신을 회복한다.
수능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는 인간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 안에 ‘두려움’만 있고 ‘성찰’이 없다면, 그것은 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욕망의 주문이다.
신은 인간의 성공에 흥미가 없다.
오히려 실패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배우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 기도는 당신의 믿음을 키우는가, 아니면 불안을 합리화하는가?
신을 도구로 삼는 순간 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의 욕심만 남는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게 된다.
신이 침묵한 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