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어머니들의 무리한 선행학습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는 과거 청년들에게 혼수로 집을 무리하게 요구하던 세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당시의 여성들은 억압받은 삶에 대한 반발로 자유와 요구를 당연시했고, 어머니 세대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종용했다.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이 오늘날 자녀 양육에 투영되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아와 욕망을 덧씌운 왜곡된 방식의 사랑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최근에는 초등학생이 고등학생 모의고사를 푼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나는 이 현상이 과연 옳은 일인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게 된다. 사춘기도 오기 전, 세상을 자유롭게 탐구하며 삶의 방향성을 스스로 정해야 할 시기에 이미 정해진 궤도를 향해 코뿔소처럼 달려가는 모습. 그렇게 달려간 끝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쓰러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어떤 학생은 서울대에 합격한 뒤, 합격증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이런 일이 점점 더 잦아질 수 있다는 점이 두렵다. 언제부터 자녀의 학벌과 직업이 행복의 척도로 등치되기 시작했는가. 이 질문으로부터 문제의 뿌리가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육지로는 단 한 갈래의 길만 열려 있다. 이런 지형적 특성 탓에 2천 년 동안 5천 번의 침략을 받았다고 한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 속에서 안정된 삶에 대한 집착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 리스크를 감내하지 못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기형적인 교육 풍토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는 방법이 거창한 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30권의 책을 깊이 있게 읽게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방향성을 잡는 데 충분하다.
30권을 읽으면 방향이 보이고, 100권을 읽으면 삶이 달라지며, 300권을 읽으면 부자가 되고, 500권을 읽으면 해탈에 이르며, 1000권을 읽으면 철학자가 된다.
실제로 어떤 목사는 비행 청소년을 변화시키기 위해 4복음서를 7번, 총 28회 읽게 했다고 한다. 그의 방식은 나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과거에는 방황했지만 지금은 올바른 태도로 살아가며, 그를 통해 청소년들이 최소한의 회복을 이루는 모습을 보며 감사함을 느꼈다.
나는 모두의 자녀가 의사가 되어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 철학자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하고 멋진 삶이라고 믿는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글 한 편을 더 써 내려간다.
그날이 오면, 신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 나라가,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