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과 단식

by 삶 집착 번뇌

요즘 신학생들이 운동하는 경우가 많다. 보여지는 일이 많기 때문인지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운동은 본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수행의 한 방식으로 삼던 것이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역시 운동선수였다.


모든 종교에는 단식을 통한 의식이 존재한다. 단식은 수행이자 속세의 욕망을 끊어내는 작업이다. 흥미로운 점은 운동과 단식이 정반대의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단련’을 통해 몸을 강하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절제’를 통해 몸을 비워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두 방식 모두 깊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친 뒤 샤워를 하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고 한다. 철학에서는 영과 육의 조화를 추구하고, 종교에서는 영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두 관점 모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종교가 육체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운동이든 단식이든,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이 깊은 사색과 진리 탐구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나 역시 배고프고 외로울 때 글이 가장 잘 써진다. 배부르고 외로움이 채워질 때는 문학이 나오지만, 고통 속에서는 철학이 나온다.


요즘 신학생들을 보면 ‘성스럽다’기보다는 ‘철학적이다’보다는 오히려 약간 ‘허세스럽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물론 젊고 어리니 이해할 부분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 “왜 살을 빼겠다고 운동을 할까? 나였다면 단식을 선택했을 텐데.”


불교에서는 ‘안거(安居)’ 기간 동안 금식을 한다. 상안거와 하안거는 약 3개월 동안 이어지는데, 이 기간에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사만 한다. 수행이 끝나면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그때 부모들이 자녀들의 건강을 염려해 몰래 사골국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는 현대의 과잉 섭취 사회에서 단식이 건강과 정신 수양 모두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가끔 20시간 금식을 실천한다. 이유는 건강과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집중과 고요함 때문이다.


요즘 신학생들이 운동을 통해 외모를 가꾸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동시에 단식과 같은 내면적 수행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단식이나 외로움 같은 고통이 곧바로 깊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리를 향한 수많은 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현대인에게도 나는 단식을 권유하고 싶다. 고통에 익숙해지면 현생에 대한 감사가 커지고, 절약도 가능하다. 성직자든, 수련 성직자든, 신앙인이든 모두가 단식을 한 번쯤 경험해본다면 어떨까. 감히 그렇게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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