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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달 Sep 27. 2024

문제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

문제에 압도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엄마 혼자 남은 집에서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대니얼 고틀립 <샘에게 보내는 편지> 였는데 겉장을 펴니 "2019년 5월 6일. 장녀가 줌"이라고 적혀있었다. 책을 다시 집으로 데려와 꽂아놓고 마음이 산란할 때 들춰보면 힘이 된다. 많이 아파봤고 온전히 아픔을 감당한 사람만이 전해줄 수 있는 메시지 해서다.






세상의 모든 샘에게 보내는 편지.


<샘에게 보내는 편지>의 발신자는 할아버지 고틀립이고 수신자는 손자 샘이다. 틀립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를 입은 후천적 장애를, 샘은 자폐증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갖고 있다.



살다 보면 '고 싶지 않은 ' 당할 때가 있는데 그런 때 어떻게 해 왔던가.


글에서 고통을 힘겹게 관통한 사람이 거머 '힘'이 느껴졌다. 그 '힘'이 내게 전해졌고 내 삶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의 편지는 손자 샘에 한정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세상의 모든 샘에게'보내지는 것 같았다.

엽서그림 By momdal

문제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문제'나'를 구분하지 못 문제에 압도당 했다. 문제와 나를 는 게 장히 중요한 거였데, 말로는 쉬운데 실제로는 쉽지 않다. 틀립 같은 맥락에서 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자폐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자폐증이 곧 너는 아니다."


원하지 않았어도 이미 눈앞에 벌어진 되돌릴 수 없음현실과 다기도 했다. 결국 신만 상처 입고 완패完敗하고 걸 뻔히 알면서. 머리는 알아도 몸은 거부하는 저항은 본능인 걸까. 상처 입는 줄도 모고 내달릴 때도 있지만 '나름' 지름길이라고 믿고 가로질러 가다 그게 아니 걸 깨닫도 한다. '용기 내어' 정면돌파를 도하다  무너지는 경우 . 한바탕 지옥살이를 끝낸 복기해 보면 드러나는 사실, 참 어리석구나.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게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받아들이고 감당하라' 신의 상명이다. '문제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결코 잊지는 말라는 당부지 포함해서.

엽서그림 By momdal


담아주는 그릇 - 담기는 것 (container - contained).


대상관계 이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양육자 아이의 관계처럼, 상담자내담자가 투사한 내용을 적절하게 담아내그릇내담자는 거기에 담기게 된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긴장과 불안, 혼란을 담아주고 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양육자의 역할이다. 상담사의 역할, 나아가 글 쓰는 사람의 역할도 비슷하다.


담아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꿈쩍하지 않을 때조차 따스한 눈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 담아주는 것이 아닐까. 고틀립의 말을 빌리면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다. 더불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고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없이 한발 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해 줄 사람 곁으로." <샘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내면의 피난처.


모든 것을 피해 숨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도 내 입장이 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무너질 때, 내가 나를 감당하기 힘들 때 숨을 곳이 필요하다. 이런 때 나는 누군가에게 담겨야 하고 누군가 나를 담아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이 없어도 나는 괜찮다. 첫새벽 고요 속에 앉아 내 안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만나면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신神이라고도 하고 셀프 Self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저 '내면의 나'라고 부르고 싶다. 내면의 피난처에는 문제를 거뜬히 이겨내고 감당해 낼 에너지, 힘이 있다.


나는 불안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호흡을 관찰하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러면 시간만큼은 살만해진다. 점점 살만한 시간이 늘어나면 버티고 견딜만한 힘도 커진다.

숨을 들이쉴  때 속으로 '들숨'이라고 하고 숨을 내쉴 때도 속으로 '날숨'이라고 하다 보면 묘하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자신을 돌볼 수 있는 꽤 쓸만한 방법이다. 아니, 직방直放이다.





해가 짧아졌다. 아직 창밖은 어둡다.

또 내게 주어진 하루, 한 템포 늦추고 사랑으로 들이쉬고 그 사랑을 날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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