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 깨어 처음으로 내는 소리로삼종기도를 바친다.이어서 입당송 전주가 흐르고 사제가 제대 앞으로 다가갈 때까지 성가는 계속된다. 새벽미사가 시작된 것이다.
발바닥 신자.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나는 주일 미사 빼고 한번 더 성당에 갔다. 매주 한번 새벽미사 반주를 맡았기 때문이다. 소속본당이 바뀌고 요일이 달라지거나 출근시간이 바뀌어도 새벽시간, 어차피 새벽에 눈이 떠지니까 할만했다. 아마 삶이 순탄했더라면 잠시 하다가 그만뒀을 것이다.
이사나오면서 봉사를 접었다. 남들 눈에는 새벽에 성당에 나오는 신심 깊은 자매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복을 비는 마음으로 왔다가는 '발바닥신자'였다.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이 다 빠져나간 시간, 혼자 묵상곡을 두세 곡 더 치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뭔지 모르게 달랐다. 그 다름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차이가 15년 이상 계속하게 만든 동력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새벽 거리에서.
05:20
매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오가는 반복이지만 똑같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달랐고 신선했고 생기가 감돌았다. 계절이 바뀌면서 해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했는데 성당을 오가면서 스치는 사람들도 보이다 안 보이다 했다. 성경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새벽기도 가는 개신교 크리스천. 새벽배송으로 댓바람부터 뛰어다니는 쿠팡맨. 제과점 앞에 재료가 담긴 플라스틱박스를 놓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트럭기사. 강남으로 청소하러 나가는 아줌마들. 밤샘 경비 끝나고 퇴근하는 아저씨들.
어떤 이는 일터로 향하고 다른 이는 일을 마치고 누군가는 시작하고, 삶은 멈추지 않고 굴러가고 있다. 새벽부터 노동을 해야 하는 생존, 생활을 떠올릴 때면 그들의 하루도 무사하라고 화살기도를 올리곤 빠르게 내 갈길을 간다.
도돌이표.
나의 기도는 도돌이표였다. 힘들면 원망하고 하소연하고 매달리다 살만해지면 등한시했다. 삶도 도돌이표 같았다. 지리멸렬하고 지루한 반복기호 안에 갇힌 것 같았다.
어렸을 적, 시소 탔을 때와 빗대어 본다. 올라갔다 다시 내려올 때까지 몸을 맡기면 되는데 괜히 다른 곳에 한눈을 팔거나 갑자기 내리려다 쿵, 사고가 날 뻔했다. 손잡이를 잘 잡고 맞은편 친구얼굴을 보면 안심이 됐다. 요령이 생긴 거다. 삶에도 요령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삶도 고苦와 락樂, 둘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시소를 탄다. 하루에도 골백번 반복기호에 갇힌 듯 괴롭다가 즐겁다가 불편하다가 편안하다가 그런다. 분명한 건 계속해서괴롭고 계속해서즐겁지 않다는 거다.천만다행이다.
세상에 도돌이표로만 만들어진 악보는 없다. 같은 마디를 되풀이 연주하더라도 판박이처럼 똑같을 수 없고 미세한 다름, 변화가 있다. 적어도 셈 여림이 다르거나 악센트로 다른 느낌이 든다. 크레셴도나 데크레센도, 셈여림에 따라서도 다르다. 이렇듯 삶이라는 음계도 진폭과 강도를 달리해 고苦와 락樂이 시소를 타는 것 같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하모니를 이루면 삶의 곡조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엽서그림 By momdal
오늘은 새날.
새벽의 고요함과 어두움.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집중하기 좋다. 나를 잃어버리고 그저 열심히 살았던 시간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오롯이 나만 남는다. 전경에 자리 잡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뜻하지 않은 일들이 내 마음 사막으로 만들고 마구 뒤흔들어 놓았어도'이 순간 나는 살아있다.'상처투성이지만 웃고 있다.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겨 나간 어제는 가고 새날이 온다. 어제와 같은 분량의 24시간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 어제를 놓은 손으로 오늘을 잡기만 하면 된다. 시작하는 설렘이 곧 마주하게 될 우연과 낯섦을 무릅쓰게 할 것이다. 새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