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나 본데 파도가 부서지는 거친 소리에 잠이 깼다. 뒤척이다 살금살금 발코니로 나왔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사람소리가 있다. 일출은 06시 45분쯤이라고 했고 그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은 더 남았으니 해변에 나가있을 사람은 없을 텐데, 소리 나는 쪽은 바다다.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어둠을 지켜보니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꼬리지느러미 같이 생긴 그 뭔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는데, 오리발 같았다! 그 곁에 공모양의 테왁도 보인다. 아, 해녀다 해녀. 테왁을 세어 보니 4명이다.
언제부터 저기서 물질을 하고 있었던 걸까.
둥근 해 말고 둥근 테왁.
날이 흐려 해 뜨는 사진은 영 글렀다. 붉은 공처럼 바다 위에 톡 튀어 오를 줄 알았건만 실망스러웠다. 검정에서 진파랑으로 연파랑으로 그라데이션 되는 하늘만 보았다. 일출보다 내 시선과 마음을 끄는 것은 해녀였다.
해 뜨자 해변에 나가 맨발로 걷다가 해녀들을 만나면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서성거렸다. 해변산책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씻고 짐 챙겨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해녀들에게 쏠렸다. 물질은 계속, 4시간째다. 4시간을 걷는다 해도 중간에 여러 번 쉬고 화장실도 들러야 할 텐데, 해녀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 잠수복과 잠수용 오리발, 마스크가 장비 전부라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인간이 본래 물속에서 자란 존재라 그런 걸까. 해녀에게 바다란 태아를 보호하고 출산할 때 흘러나와 분만을 쉽게 하는 양수인지 모른다. 뒤늦게 생각난 것은 그녀들의 쉼은 뭍이 아니라 바다, 테왁을 끌어안는 것이리란 짐작. 얼추 맞을 것 같다.
해녀들의 바다밭 엄마들의 마음밭.
삼국시대 이전부터라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해녀가 '물벗'과 함께 바다에 있다. 해녀들의 일터, 바다밭이 마을과 인접해 있나 보다. 숙소 뒤편 마을에 사는 걸까. 물가에서 어장까지 헤엄쳐 나가는 순간 어떤 느낌일까. 테왁에 잠시 기대어 쉬던 해녀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고성 앞바다에서 나는 성게가 제일 맛있다는 데 망사리에 성게만 있는 건 아니겠지, 또 다른 뭐가 있을까. 내 눈에 수심은 얕고파도가 세 보이는데 그런 데서 물질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이런 것은 검색이 아닌 삶의 현장 목소리를 통해야 하는데 아쉽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이 고작 이거다.'수압과 산소의 양을 감지하고 수면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잠수하는 시간을 스스로 조절해야 가능한 일' '숨을 참고 물속에서 강한 수압을 견디며 작업을 해야 해서 난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이고, 정작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삶을 관통해서 얻은 강력한 무기, 지혜다.
친구가 하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친정엄마가 늘 딸들에게 했다는 말이란다.
'넌 육지 나가 살아라'
얼마나 삶이 고단했을까. 무거운 납덩이를 허리에 매고 테왁과 망사리를 짊어지고 바다에 뛰어든 삶. 해녀의 삶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의 삶과 닮아있고 맞닿아 있다. 기계장치 없이 맨손 맨몸으로 숨을 참고 숨을 내뿜었을 모든 어머니, 애잔하다.
'넌 육지 나가 살아라. 여기 섬에서 살지 말고.'
어딘가에 매여 살지 말아라! 숨을 너무 많이 참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
이 말은 엄마로 살아가는 이 땅의 딸들에게 하는 따뜻한 당부로 엄마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엄마의 마음씀씀이는 너그럽고 마음밭은 넓다.
숨이 한계에 다다를 때 나는 숨비소리.
해녀들이 1~2분가량 잠수하며 생긴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한꺼번에 내뿜고 산소를 들이마시는 과정에서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소리가 나는 거란다. 이걸 '숨비소리'라고 하는데 바위에 부서지는 거친 파도소리 때문인지 그 소리가 내 귀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처음에 해녀들을 알아챈 것도 그들의 말소리였고 둥근 테왁의 형체가 눈에 들어와서였다.
해녀들이 숨을 내뱉으려고 몸을 물밖으로 낸다. 삶의 무게로 숨이 가빠올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 밖으로 몸을 빼내고 숨을 크게 쉬어야 한다. 문제 안에 있는 탁한 공기를 내보내고 문제 밖에 있는 맑은 공기를 들여야만 살 수 있다. 심장은 쉴 새 없이 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존재인지 모른다. 부단히 숨을 깊이 들이쉬고 크게 내쉴 뿐.
B장조를 닮은 삶.
음을 올리거나 내리는 조표는 감정적인 요소와 밀접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단조는 슬픈 느낌, 장조는 밝은 느낌을 준다. 조표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올림표(#) 다섯 개가 붙은 B장조는 통제되지 않은 열정과 대담한 분위기다.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것 같아 거칠다.
잠을 설치게 한 거친 파도와 새벽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은 혁명을 노래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2번을 떠올리게 한다. 잠 깨어 새벽에 본 것과 떠오른 음악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10월에게'라는 부제는 1917년 10월 공산혁명을 말하는데 같은 달, 10월이라는 점. 어느 작곡가가 이 곡을 두고 '푸르스름하다'라고 했다는데 곡처럼 새벽바다도 푸르스름하다는 점. 우리나라에서 연주된 바 없지만 쇼스타코비치의 혼란스럽고 묵직한 음악과 우리네 삶이 닮았다는 점까지.
조표가 붙지 않은 C장조의 삶은 간결하고 단순함이 있고 D장조의 삶은 승리를 환호하는 함성 같고, E장조의 삶에는 충동적인 노여움의 감정이 묻어나고 F장조의 삶은 언제든 폭발할 것만 같은 고요가 있다. 목가적이고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G장조의 삶과 현실에 대한 만족감이 드는 A장조까지 저마다의 분위기에 맞는 조성으로 삶을 연주한다. 장조만 봐도 그런데 단조까지 포함하면 삶을 표현하는 연주는 훨씬 섬세하고 풍성해진다. 지금 처한 삶이 B장조같이 거칠고 한바탕 전쟁 같을지라도 언제든 조표는 바뀔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쉼 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영원한 게 없는 삶, 그래도 오늘만큼은 잔잔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