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나가도 좀처럼 오지 않던 가을이 늦게 도착했다. 더위가 가시지 않더니 이틀 전 내린 비로 문밖에서 서성대던 가을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을이 곁으로 성큼 다가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써늘하다 못해 새벽은 춥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와서 기쁘다. 걷기도 좋고 독서도 좋으니 무엇을 해도 다 괜찮은 가을이 와서 좋다.
엽서그림 By momdal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귀에 익은 멜로디가 가을만 되면 입에서 흘러나온다. 처음 북유럽에서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던 곡 <봄을 위한 세레나데>가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불려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사도 좋다.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때문일까 아니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때문일까, 둘 다겠지. 축가로 불리는 이유가. 가사를 음미해 보면, 널 만나고 네가 있는 세상이 최상이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축가가 있을까 싶다.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법, 그런 때가 내게도 있었건만 아득하다. 이런 기억만큼은 죽는 날까지 박제되면 좋으련만, 잊혔다 색이 바래 이따금씩 떠오르다 만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심하고 일조량이 줄면 단풍이 이쁘다는데 뒤끝 작렬 늦더위 때문에 이제야 단풍 들기 시작한다. 잎이 죄다 초록인데 끄트머리만 발그레한 걸 보면 봉숭아물이 다한 손톱 끝이 떠오른다.
그림책 <프레드릭>의 주인공이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듯 나도 가을 빛깔은 사진에 가득 담을 작정이다. 오다가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를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단풍명소 행락객이 되지 않아도.
가을 우체국 앞에서.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에게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고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에게서는 우직함이 느껴진다. 꽃과 나무들처럼 자신의 모습 그대로 홀로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주인과 직원 사이의 건강함은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두려워할 때 가능한 것 같다.
전에 책을 읽다가 훅하고 마음에 파고든 말이 있다. '상호허겁相互虛怯' 서로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가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영국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이것은 적당히 두려워하는 관계가 생태계에 최적이므로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순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홀로 서라는 말이다. 두려움은 조심성을 갖게 하고 적당한 거리를 만드는데, 나만 존중하고 남을 무시하면 성격장애가 되고 반대로 하면 신경증이 되는 거다. 나는 책에서 본 말을 '상호존중으로 상호허겁해야 한다'라고 정리해 마음에 담아두었다.
우체국 앞에 있을 일이 별로 없어진 세상, 손 편지를 쓰지 않는 세상이지만 필사든손글씨든 그림엽서든손으로 내려쓰는 것도 괜찮다. 굳이 우표를 붙여 띄우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내보이지 않아도 혼자 끄적대는 일이 평온이니, 그럼 다 된 거다.
엽서그림 By momdal
한계령.
숱하게 드나들던 속초, 더 이상 한계령을 넘을 필요 없이 미시령 터널을 통해 곧장 들어갈 수 있다. '내게 우지 마라, 잊어버리라 하고' '지친 어깨를 떠민다'라고 노래한 양희은의 한계령은 명곡이다. 태백산맥을 넘는 구불구불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 큰애 아가일 때 한계령휴게소에서 찍은 사진은 지금도 선명하다. 카메라를 놓고 갈 뻔했던 기억도. 사진기가 없거나 여분의 필름을 준비하지 않으면 사진 찍지 못하던 구석기 같은 이야기다. 카메라에 넣었던 필름을 빼 사진관에 맡기고 며칠 후 현상된 사진을 찾아오는 설렘과 마음에 드는 것과 들지 않은 것을 구분해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만 남긴 이야기도 옛날 옛적이다.
숲세권에서 잠시 역세권으로 나와 사는데 여기서는 샛별을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저 하늘 어딘가에 늦게까지 남아 있을 새벽의 별, 해 뜨면 밤샘근무 마치고 퇴근하겠지. 새벽별은 쉬러 가고 우리는 일어나는 시간, 새벽별과 우리들의 교대시간이다. 이 시간의 서늘함과 고요함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