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질 무렵 숙소에 들어와 주변을 충분히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눈뜨자 밖으로 나갔다.기온이 뚝 떨어져 손이 시렸지만 잔뜩 껴입고 살금살금 숙소를 빠져나왔다.
완전 내 세상.
이곳 휴양림을 통째로 빌린 것처럼 구석구석 걷고, 찍고, 휘젓고 다녔다. 숙소 앞에 주차된 차를 보면 사람이 있다는 뜻인데 나처럼 깨어있는, 밖에 나와있는 사람은 없었다.
잔잔한 아침 햇살.
혼자 휘젓고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모조리 삭제했다.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나가보니 햇살이 일렁여 숲이 몰라보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햇살로 단장을 마친 꽃과 나무, 물에 비친 하늘까지 '엄청' 예뻐져 있었다.
햇볕이 들기 전과 후는 뽀샵여부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손이 시려 호호 불며 다닌 보람은 없지만 햇볕이 뽀샵기능을 담당해 주어 흡족했다.
하룻밤의 짧은 인연.
가을숲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건 역시 '빛'이란 생각, 삶에도 해 뜰 때의 밝은 에너지와 빛나게 비춰주는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스친다.
하룻밤 짧은 시간이 아쉽지만 가을은 숲에 두고 오래 간직할 사진만 챙겨 숙소를 빠져나왔다.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불과 30분 거리에 어머니가 누워계신 요양병원이 있다. 허리가 굽고 아팠어도 걸으실 때가 좋았는데,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나다라'를 배울 기회도 없이 고생고생한 어머니, 몸이 상하는 동안 자식들은 제 앞가름하고 살기 바빴으니, 누굴 탓하랴. 지나간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걸을 수 없어도 통증만 가시면 좋겠다고 했는데 통증조절이 되니 이젠 휠체어라도 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완주 소양면에서 나고 자란 처녀가 동상면의 총각한테 시집와서 살았다는 역사의 현장을 지났다. 전주시에 나와 산 기간이 길어 전주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본래 시작은완주였다는 걸, 아름답고 잔잔한 고장이란 걸오늘 알았네.
요즘 읽고 있는 책 <허송세월>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김훈의 <허송세월> 43쪽에 나오는 글이다.
저렇게 허송세월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 아닌가.이렇게 '사람의 가장 기초적인 이동 방식' 걷는다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