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부족하더라도 격려해 주는 사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언니들을 따라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 앞 건물이었는데, 첫째 언니는 수학 학원에 다녔고, 둘째 언니는 피아노 학원. 나는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미술학원에서의 시간은 즐겁기만 했다. 빈 종이 위에 그리고 싶은 장면을 마음껏 그리는 것도, 알록달록한 종이를 접거나 잘라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나에게는 큰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장래 희망도 늘 미술 선생님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그 꿈은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방과 후에 같은 지역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미술 선생님이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개미는 손재주도 좋고, 창의력도 좋아서 미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꼭 미술부에 들어와야 해.”
고등학생이라니. 너무 아득한 미래 이야기였지만, 그 말은 선명하게 마음속에 새겨졌다. 누군가가 나를 격려해 준다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하루빨리 고등학생이 되어 미술부 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자, 엄마는 내가 예체능보다 국영수 과목을 더 열심히 하길 바라셨다.
방과 후 교실 신청서를 가지고 집에 온 날, 엄마는 나를 시화집 만들기 반에 보내기로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곰 인형을 만드는 테디베어 반이나, 예쁜 글씨 POP. 삶으면 지우개가 되는 요술 점토 반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재료비도 너무 비쌌고, 그 당시의 엄마는 엄하고 무서웠기에 군말 없이 신청서를 챙겨 들었다. 제출 직전까지 몰래 체크 표시를 바꿀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들어간 방과 후 시화집 교실은 나와 같이 억지로 온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바람에 원하는 반에 들어가지 못한 친구는 하기 싫다며 펑펑 울어버렸다. 그 아이는 결국 정원이 초과하는 반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원하는 걸 쟁취한 그 애가 부러웠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 한 번 못 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나는 조용히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여름과 비에 관한 시제로 글을 썼다. 써본 글이라곤 일기와 독후감이 전부였기에, 시 쓰기는 너무 어려웠다. 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글들이 탄생했다.
비 온 날
ㄱHMㅣ
맑은 날 기분 좋게 학교 갔던 날
학교가 끝나니 비가 내렸다
어쩌지? 우산을 안 가져왔는데…
밖을 보니 엄마께서 웃고 계셨다
커다란 우산과 작은 우산
나란히 어깨 맞춰 집에 도착하니
무지개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 꾸미는 것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어색하기만 한 시가 쌓여갔다.
여름방학을 앞둔 마지막 수업 시간. 뽀글머리 선생님께서는 개개인이 쓴 시를 엮어 책을 만들어주셨다. A4용지에 색연필로 글을 쓰고 그림 그린 걸 스테인플러로 찍어준 게 전부였지만, 그건 분명 내가 만든 첫 책이었다.
아직도 한 권의 책이 되어 돌아온 글을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처음 알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쓴 글을 엮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짜릿하고 매력적인지를. 그 후로 나는 종종 일기장에도 시를 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은 글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분이었는데, 덕분에 나 역시 글쓰기와 더욱 가까워졌다. 매일매일 일기장을 제출하면 선생님께서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작은 격려의 글을 남겨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가는 토요일에는 2시간씩 글쓰기 시간을 가졌고, 매달 마지막 토요일엔 조별로 학급 문집을 만들었다. 문집에 수록하기 좋은 글은 선생님께서 아이들의 글쓰기 공책과 일기장을 읽으며 별표를 쳐놓으셨다.
“야 이것 봐. 김개미 일기장엔 다 별표야.”
하나 걸러 하나꼴로 별표가 그려져 있는 내 일기장에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쑥스러운 마음에 얼른 일기장을 숨기자, 몰려든 인파를 쫓아내 준 단짝 친구가 말했다. 잘해서 칭찬받은 일이니까 앞으로는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자랑하라고.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어찌나 따뜻해졌는지 모른다. 어쩌면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부족하더라도 격려해 주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글쓰기가 점점 재밌어졌다. 학년이 바뀌고 새 교과서를 받을 때마다 국어 교과서 속 글을 모조리 읽는 게 습관이 될 정도로 글이 좋아졌다. 교과서 속 다양한 글을 접하며 수필과 시를 넘어서 소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글의 뒷이야기를 상상해서 쓰는 숙제를 하며 언젠가 나도 재밌는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글쓰기는 하기 싫은 활동이었고, 억지로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 의지로 선택한 길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응원에 힘 입어 계속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글 자체가 내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때론 선택하지 못한 길이 인생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내 안에 조용히 움튼 싹은 지금도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