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轉) – 정지된 세상 속에 스며든 균열
사우디의 모든 것이 싫었다.
이곳의 햇빛, 모래, 공기까지 전부다.
현지 업체를 방문할 때마다 마주하는 그 금색 액자들—왕세자 모하마드 빈 살만을 포함한 세 남자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들은 “너 여기 왜 있냐?”라고 묻는 듯했고, 나는 매번 “그러게, 모르겠다”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하루하루가 나를 갉아먹었다.
자재가 없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는 건 일상이었고, 공사 지연은 내 탓이 되어 돌아왔다.
설계와 시공 사이의 조달 담당자라는 위치는 마치 샌드위치 속 상추 같았다—무게만 받지, 주인공은 아니다. 심지어 상추는 아삭하기라도 한데. 나는 그냥 눌리고 또 눌리기만 했다.
현지 업체들은 내 노력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고, 직접 방문해서 스케줄을 쥐어짜 내도 '인샬라'
(إن شاء الله Insha’Allah / 신의 뜻대로 / if God wills)라는 한 마디로 내 말을 기세 좋게 씹는다.
그들의 철벽 방어는 거의 악귀퇴치 수준인데,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안은영'이
가졌던 것처럼 퇴마를 위해 장난감 총과 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무실 구석의 빨간 소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걸로 내 마음속 불도 꺼지려나…” 하는, 감상적 망상이 잠깐 스쳤다. 절박한 내 마음의
반사작용이었다.
내가 수행하고있는 사우디아라비아 J 프로젝트 발주처인 A社 직원들은 한국 EPC Contractor(건설 회사)
직원을 일종의 ‘하인’처럼 취급한다. 프로젝트 Task Force Team이 있었던 한국에서 같이 일할 때도 그랬
지만, 이곳이 홈그라운드다 보니 그 태도는 더 노골적이다. 본인이 필요할 때는 담당자를 수시로 불러대면서, 정작 자기 일에는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재 한 줄을 통과하려면 다섯 명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중 셋은 실종, 하나는 회의 중, 나머지 하나는 본인이 왜 결재를 해야 하냐며 내게 진지하게 묻는다. 그렇게 일을 질질 끌다가 정작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기한 안에 일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아주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성을 쏟아내며 책임은 모두 내 몫이 된다. 그들의 태새 전환 속도는 거의
국지성 호우급이다.
그런 그들도 벽안(碧眼)의 서구인은 보면 눈빛부터 다르다. 그걸 지켜볼 때마다 나는 치가 떨릴 정도로 식었고, 그 감정은 부러움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혐관심에 가까웠다.
“니들이 누구 덕에 공장을 짓고, 돈 버는지 알아?”
그 말을 꾹 삼키는 게 하루의 최대 성과였다.
결국, 분노는 서서히 얼어붙었고, 냉담해진 감정은 체념으로 변해 뜨겁게 타올랐다.
애써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곳의 모래바람은, 사람을 바스러지게 만든다.
그건… 인정해야 했다.
[사진 1] 사우디에서는 어디를 가던지 실내 건물에 들어서면 금색 액자에 담긴 저 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기업은 물론이고 호텔, 대형 마트까지 예외는 없다.
[사진 2] 소화기가 내 마음속의 불도 꺼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진 3] 나에게도 악귀를 퇴치할 수 있는 장난감 칼과 총이 있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