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저녁식사를 차렸다. 분명 배가 많이 고플텐데 평소처럼 서둘러 숟가락을 뜨지 않는다. 그만큼 남편도 마음이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어려운 내 마음을 신경 쓰느라 눈치가 보여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뭐가 됐든 나부터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아서 국과 밥을 복스럽게 먹어 보였다.
사실 나는 이미 낮동안 한바탕 울어재꼈다. 그러면서 일단 마음에 담겼던 감정의 에너지들은 대충 쏟아낸 것 같다. 하지만 일터에서는 큰 동요를 할 수 없었던 남편의 감정 정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뭘까, 하며 남편이 입을 뗐다.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 '혹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주시거나 한 적이 있어?'라고 또 묻는다. 신앙을 갖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의 믿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내 묵상과 기도제목을 항상 다 나누는 것은 아니다. 이해를 못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사실 오늘도 그때와 똑같은 성경구절이 내 마음 속에 떠올랐었다. 상습정체구간인 경부고속도로의 초입부터 양재까지는 멍하게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며 그저 앞 차의 뒤 꽁무니를 조금씩 따라갔다. 만남의 광장을 지나면서부터 속력이 나는데 넓은 하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마음 속으로 하늘에 계신 분을 불러보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미 여러번 묵상했던 말씀구절이 마음 속에서 쑥 올라왔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9장 1-3절
유산은 지금껏 겪어본 것 중 가장 아프고 무서운 경험이었다. 유산이 진행됨으로 인해 그 작디작은 아가가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데에도 진통을 겪어야 한다는 걸 예전에는 몰랐다. 처음에는 큰 볼일에 대한 신호인 줄 알고 화장실을 갔다. 다녀왔는데도 나아지지 않아 배를 움켜잡고 누워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의 간격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이 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게 말로만 듣던 진통이구나 했다. 그러다 밤이 되어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남편은 나를 데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갔다. 늦은 밤 응급실에서의 상황과 그 때 겪었던 통증에 대한 공포는 꽤 오랫동안 내 몸과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라 또다시 임신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예상 가능한 유산의 양상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에, 주치의 선생님은 유산 가능성을 줄여가며 시도할 수 있는 방법으로 PGS (착상 전 유전자 진단) 검사를 시작해볼 것을 제안했다. 병원을 다니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 중 이미 PGS 검사를 하고 있던 친구들이 몇 있었고 어떤 과정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나도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 PGS 검사라는 것이 매우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PGS 검사를 할 수 있는 케이스도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 부부는 검사를 해 볼만한 컨디션이었고, 주치의 선생님도 결과를 꽤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이 과정만 통과하면 우리는 머지않아 건강한 아기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다섯 번째로 진행한 PGS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라 함은 지난 네 차례의 검사에서 정상 배아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래서 다섯 번째 검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늘의 결과도 모두, 탈락이었다.
대체, 그 조그만 세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우리의 배아들은 검사를 보내는 족족 탈락인 걸까. 그간 병원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우리의 배아는 육안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었다. 소위 최소 중상급 등급이라고 매겨지는 처음에는 포도알처럼 동글동글했다가 잘 분열이 되어 눈사람 모양이 되는 모습의 것들이었다. 1차적으로 수정된 배아의 상태들이 좋고 건강했기 때문에 그 중 유전적으로 문제가 없는 배아 한두개 정도는 머지않아 곧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 다섯 번의 PGS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일 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염색체가 잔뜩 그려진 차트를 띄워 보여주며 '이번에도 잘 안됐네요'라고 말하는 주치의 선생님에게서도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환자도 환자이지만 의사 입장에서도 본인이 담당하는 환자에게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낙심이 될까.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하는 일을 누가 계속하고 싶을까. 나라도 슬럼프가 올 것 같다.
병원에는 늘 대기 환자가 넘쳐나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진료를 마무리하는데 오늘은 선생님도 생각이 많은지 말하는 중간중간 약간의 공백이 있다. 나도 평소에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오늘은 뭐라도 하나 묻고 싶었다.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뭐라도 내뱉고 싶은 답답함에서 나온 혼잣말 같은 질문이었다.
"선생님, 저희 이제.. 그만할까 봐요."
"그게 참.. 어렵네요.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또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요.."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나보고 참 단단한 것 같다고 한다. 보통 이 정도 되면 엄청 무너져서 오거나, 진료실에서 눈물을 쏟곤 하는데 나는 늘 흔들림 없는 모습인 것 같다고 했다.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 많지 않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을 오래 봤지만 이런 얘기를 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이 상황에서 나를 향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격려와 칭찬의 의미겠거니 하는 마음에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인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좀 받았던 적이 있다. 가족 안에서의 오랜 문제로 마음이 너무 다쳐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들 때였다. 몇 가지 심리검사를 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통제 부분이었는데 그 수준이 심각할 정도로 높다고 했다. 지금은 어른이 된 내가 다시 과거의 나를 돌아보아도 어릴 때의 나는 특별히 모난 부분이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말썽을 피운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나이 또래에서 보여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부모님은 종종 번갈아 손찌검을 했고,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는 엄청난 폭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자라면서 뭔가 품어지거나 받아들여진 기억이 별로 없다. 점점 자신감이 없는 아이가 되었고,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라도 나의 진솔한 감정들은 나도 모르는 깊은 곳 가운데 묻어두고 스스로를 점점 더 통제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난임은 내가 지금껏 겪은 경험 중 가장 고되고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종종 퉁퉁 부은 눈으로 진료실을 나서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들은 나와서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대기실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무슨 일일지, 얼마나 마음이 힘들면 저렇게 주체 못 하고 서럽게 울까 보고 있으면 나도 다 마음이 아프다. 한편, 그에 못지않게 나도 많은 풍파를 거쳐 여기까지 온 사람인데 정작 나는 저렇게 땅이 꺼지도록 울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분명 괜찮은 게 아닌데 마음 속이 너무나 시끄러운데 겉으로 이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 년 반의 시간 동안 PGS에서 통과된 배아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식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시험관 시술의 마지막은 결국 이식을 해야 모 아니면 도로 끝이 나는 것인데 너무 오랜 시간 이 마무리를 위한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괜히 모르고 잘못 이식했다가 유산이 되면 그만큼 또 몸과 시간을 버리는 것인데 그렇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도 하고, 또 따지고 보면 이식 후 착상이 안된 것 하고 뭐가 다르냐고도 하는데, 다 맞는 말이지만 심리적인 것이 그렇지가 않다. 한 달 한 달 지날 때마다 점점 마음에 불안감은 차 오르고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진다.
이런 부담과 스트레스가 가중되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호르몬 부작용이었다. 보통 이식 전에 투여되는 프로기노바 정에 대해서는 두드러기가 자주 발생했었다. 그런데 과배란 단계에서 이렇게 두드러기가 심한 적은 처음이었다. 얼굴을 제외한 팔과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 그리고 배에 작은 물집 같은 것들이 몽글몽글 잡히더니 순식간에 온 몸을 덮었다. 가려움증에 미칠 것 같았고 긁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다못해 자꾸 손을 댔다. 긁을 때마다 작은 두드러기들은 합쳐져서 더 큰 두드러기가 되었고 피부 전체가 붉게 부풀어 올랐다. 아침이 되면 조금 나아졌고, 오후가 되면 다시 조금씩 두드러기가 올라와서 밤이 되면 가장 심해졌다. 그렇게 여러 날 밤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저 좀 살려주세요 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이번에는 뭔가 여러 가지로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컨디션으로 키워낸 난자로 과연 PGS를 통과할만한 건강한 배아를 만들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 낙심이 되고 괴로웠다. 안 그래도 호르몬 반응 때문에 몸이 지치고 힘든데, 두드러기까지 겹치니 이 상황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성경에서 온 몸의 종기를 뒤집어쓴 욥이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어대던 장면도 생각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을 나는 욥과 같이 잘 이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요한복음 9장의 한 구절을 묵상하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한 소경을 보고, 그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한 채로 태어나게 된 것은 그에게 죄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에게 죄가 있기 때문인지를 예수께 묻는 장면이었다. 이에 예수는 소경의 잘못도, 그 부모의 잘못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소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있으신 것이라고 답한다.
내가 난임을 겪고 시험관을 여정을 거치면서 크게 울었던 적이 딱 두 번이 있는데, 한 번은 뱃속의 아기가 떠나갔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이 이 때였다. 이 구절은 마치 나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래, 다만 이 경험을 통해 하늘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있으신 거래.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어보래'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어떤 뾰족한 솔루션 하나 제시해주지 않는 구절이었지만 이 구절이 나의 마음 중 어디를 터치했던 것인지, 나는 이 날 많은 눈물을 쏟았고 뭔가 큰 공감과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 구절이 그렇게 오늘 병원을 나서는데 또 생각이 났었다. 남편이 어디까지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담담하게 내가 겪었던 것들과 들었던 생각들을 말해주기로 했다. 어느덧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남편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국그릇에 그대로 담근 채 울고 있었다. 울라고 한 얘기 아니라고 안아주며 토닥였는데 그럴수록 남편은 점점 더 오열을 했다.
서로 번갈아 한바탕 울고 나니 밥과 국이 다 식어버렸다. 하지만 마음은 뭔가 후련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온전한 신앙을 갖게 된 뒤 받게 된 가장 큰 선물은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슬플 때 울 줄 모르고, 기쁠 때 마음껏 웃을 줄 몰랐던 내가 신앙 안에서는 감정 표현이 참 자유롭다.
힘든 여정 가운데에서도 감사한 것은, 이 과정을 나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겪고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간이 지독하게 외로우면서도 다시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따금씩 이렇게 신앙 안에서 채워지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었고, 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남편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남편의 눈물을 보며 속상하기도 하면서 위로가 됐던 것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 같은 거였다. 같은 상황으로 아팠고, 같은 결과로 눈물지었다가, 같은 감동으로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힘든 상황에서 뭔가 안심이 되게 만들어 준다.
같은 구절로 남편의 마음에도 터칭이 됐던 것을 보면 이 말씀이 우리 부부에게 위로가 되라고 찾아온 것이 맞는 것 같다. 도대체 하늘에서 어떤 뜻을 보이시려고 이런 긴 여정을 겪게 하시는 걸까. 사실 이런 거창한 말씀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할만큼 우리나 이 경험이 그렇게 대단한 건지도 꼭 그래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다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오늘의 이 채워짐으로 당분간의 시간은 또 견디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부디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거라면 좋겠다. 내 연약함이 도저히 감사를 찾지 못하는 순간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점점 한계가 느껴진다.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다시 한 번 기도해본다.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