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잔잔한 햇살이 가득한 오후, 5층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창밖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아빠’라고 부르며
총총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라는 글자가 내 귀에 콕 박혔다.
나는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아빠’라고 부르는 단어를
평생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아빠’와 소박한 밥 한 끼 먹는 일은
불가능한 소원으로 변했다.
아빠는 9년 전 가을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J.M. 바스콘셀로스의
소설<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 ‘제제’는 가족들에게
충분한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경제적 궁핍으로 부모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제에게 뽀르뚜가 아저씨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고,
언제나 자기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남이지만 가족보다 더 소중한 인연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뽀르뚜가 아저씨는
기차에 치여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자기를 진심으로 아껴 주었던 사람이 떠나자,
제제는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앓아누웠다.
다음은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매를 많이 맞아서 생긴 아픔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유리 조각에 찔린 곳을
바늘로 꿰맬 때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팔과 머리의 기운을 앗아 가고,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예전엔 가을을 좋아했다.
아빠가 떠난 뒤로는 가을이 오면
이유 없이 마음이 아리고 허전하다.
가을바람이 유독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
사계절이 그냥 흘러가는 줄 알았다.
계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흘러갔기에
아름다웠고, 그 사람으로 인해
사시사철이 보배로웠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잊지 못하는 과거의 한 장면이 있다.
그때 나는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옆 식탁에서 아빠가 식사하고 계셨다.
아빠는 내게 말을 거셨다.
“가을아, 아빠 좀 쳐다봐.
얼굴 보면서 얘기 좀 하자.”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계속 덮었다.
슬픔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번 생에서 아빠와의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다섯 가지를 당부하셨다.
“가을아,
1. 네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아.
돈이 따라오게 해.
2. 젊었을 때부터 건강관리랑
경제관리 신경 써.
3. 남는 건 가족밖에 없더라.
네가 첫째니까 엄마랑 동생을 잘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줘.
중간 역할 잘해서 친가와도 잘 지내.
4. 인생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해.
5.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어.
배울 것이 참 많아.
내게 다시 한번 삶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 사랑한다.”
폭풍같이 쏟아지는 눈물 소리가 들킬까 봐
수돗물을 더 세게 틀었다.
열심히 설거지하는 척했다.
끝내 아빠 얼굴을 보지 못했다.
생전에 아빠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다섯 가지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매일 곱씹는다.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다.
언젠가 나도 별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아빠 품에 포근히 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