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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법을 잊어버렸다

by 박가을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

내 자리는 6인실 병실에서 창가 쪽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커튼을 확 쳤다.

침대 위에 있던 두 발을 아래로

조심스럽게 떨어트린 후

검은색 슬리퍼를 겨우 신었다.

천천히 일어났다.


구석에서 엄마의 어깨와 손을 붙잡고

아기처럼 한 발짝씩 걷는 연습을 다시 했다.


이제 천변에서 달리기할 만큼 튼튼해졌다.

과거에 상태가 심각했을 때는 휠체어를 탔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 달 동안 걷지 못했더니

두 다리는 자기 역할을 망각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병실에만 있으니 따분해서 휠체어 타고

엄마랑 병원 복도를 한 바퀴 돌았다.


내 머릿속은 온통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미칠 듯이 답답했다.

바로 그때 마음을 툭 내려놓기로 했다.


머릿속 모든 생각을 싹 지웠다.

오로지 이 순간 1분 1초에만 몰입했다.


그랬더니 병원복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나를 스쳐 가는 걸 알아차렸다.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

살면서 처음이었다.


지금 여기에만 전념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 황홀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현재에만 열중한 덕분에

비록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다음 2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그동안 살면서 ‘지금 이 순간에만

온전히 집중’했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


둘째, 마음이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와있을수록’ 무한히 행복해진다는 진리.


주어진 이 순간과

나의 존재가 하나로 일치했을 때

진정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김연수 작가님은 책<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은 가끔씩 그렇게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불합리의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형태와 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과 좌절이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감각적 세계뿐이라는 걸.”



삶이란 순간순간의 존재임을 깨닫는 일이다.

그 찰나를 소중히 살아가는 일이다.


걸을 때는 두 발이 움직이는 일에만 집중한다.

설거지할 때는 그릇을 씻는 과정에만 몰입한다.


식사할 때는 밥을 씹는 감각에만 몰두한다.

또 꽃을 볼 때는 모양, 색깔, 향기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사람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만 열중한다.


어느 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마음이 울적했다.

곧바로 이 순간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자 우리 집 거실, TV 옆에 있는

수경재배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병 화분에 담긴 초록색 식물의 잎 색깔이

내 마음에 생생하게 박혔다.

평소에는 그 식물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때 ‘내가 지금 이 순간 속에 존재하고 있구나’를

강렬하게 느꼈다.

넘치는 평화로움에 둘러싸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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