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을 스쳐 간다.
나에게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
이사 가기 위해 이삿짐센터 사장님에게
연락했다.
견적 비용을 측정하기 위해
우리 집에 잠깐 방문하기로 했다.
사장님은 푸근한 인상과 단정한 차림에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집 구석구석을 살피며 엄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셨다.
나는 방안에서
책상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사장님이 내 방에 들어왔다.
방은 서재처럼 책으로 빼곡했다.
또 부엌 식탁 한쪽에도
온갖 책들이 쌓여있었다.
사장님은 책 읽는 나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지 궁금해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뒤 기특해했다.
책장과 식탁 위에 있는 책 제목들을
한참 훑어보더니 내게 말했다.
“좋은 책들을 이렇게나 많이 읽었다면
충분해. 대단하다.
네 인생은 앞으로 좋을 거야.
넌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체력만 더 튼튼하게 키우면 되겠다.”
사장님의 격려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사장님은 나를 안아주며 다독여주었다.
사장님도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또 책을 열심히 읽는 분이었다.
책의 가치를 잘 알았고,
책 읽는 사람을 귀하게 여겼다.
사장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무언가를 클릭한 후 핸드폰 화면을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페이스북 계정이 보였다.
직접 쓴 글들이 많았다.
평소 등산을 자주 다니며 찍었던
자연풍경 사진들도 가득했다.
사장님의 핸드폰을 내 손으로 옮겨왔다.
사진과 글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자연과 책과 글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자신만의 인생철학과 신념이 확고했다.
이때부터 더 이상 이삿짐센터 사장님이 아니라
‘자기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보였다.
책이라는 연결고리가 순식간에
평범한 만남을 특별한 관계로 만들어주었다.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감각이 생겼다.
최재천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자꾸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뭐든지 잘 알게 되면 전과 같지 않다.
외모나 조건부터 따져보는 대신
나와 똑같은 영혼으로 느낀다.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을 수밖에 없다.
책 덕분에 단순히 이삿짐센터 사장과
수많은 고객 중 한 명이 아닌,
자기 운명을 충실히 살아가는
‘고유한 한 사람’을 각자 마주했다.
처음 본 낯선 사람이지만
책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로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책으로 인해 상대의 내면과 생각을
먼저 본다는 점도 좋았다.
개별적으로 간직해 온
내적 경험을 공유하는 순간,
같은 세계 안에서 마음이 맞닿아 있음을
실감했다.
공자는 '사람을 아는 것'이 지(知)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진심이 오가는 둘 사이는
광대한 시공간 속에 떠다니는
모든 관계를 아우를 만큼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