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이면
짝짓기 혹은 연애 관찰 예능이 굉장히 많아졌다. 이제는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을 포함해 돌싱(이혼남녀), 골드미스,미스터, 심지어 시니어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분위기다.
대리만족이란 측면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은 재미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심리를 살필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롭다.
간혹 이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어디에서건 ‘직업’이라는 존재가 알게 모르게 중요한 역할을 함을 보게 된다. 최근엔 대체로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얘기를 좀 나누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신들의 나이와 직업들을 알려준다.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확실히 직업이 좀 안정적이거나 수입이 높아 보이는 이들이 많다. 물론 예전보다 직업의 다양성도 늘었다. 그렇지만 TV를 보다가 저쯤 되면 ‘자본주의 승자들의 모임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 정도로 만만치 않은 사회적 위상을 자랑하는 것은 거의 공통적이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직업이 변변찮은 사람들의 연애담을 볼 정도로 사람들은 느긋하지 않다.
(예전 모 연예인 출신인 분이 어렵게 사는 와중에 연애관련 프로에 출연해 하루 생활비를 얘기하자 단체로 탄식하던 패널들의 모습이 나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TV가 환상이란 것을 채우는 것이 강력한 시청자의 유인 요소이기에 더 자극적인 외모와 스토리, 그리고 기본바탕이 되는 직업적 위상을 가진 이들을 끌어모아 프로그램은 진행되곤 한다.
짧은 시간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근거는 많지 않다. 훈훈하거나 예쁘디예쁜 외모, 혹은 그 사람이 살아온 대강의 사정을 가늠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며칠간의 치열한(?) 관찰 정도일 것이다.
커리어 컨설턴트란 직업으로 일하고 있다 보니, 늘 관심이 가는 부분은 직업이다. 그런데 이 직업이 TV프로그램에서 밝혀지면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세상이 만들어온 상식과 같은 휴리스틱(heuristics)이란 것을 활용한다.
휴리스틱은 ‘어떤 사안(사람)에 대해 대강 가늠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인데, 개인이 정보와 시간이 부족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세상의 지식 등을
동원해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가만 보면 직업만큼 어떤 것에 대한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이미지들이 심한 것도 드물다. 의사라면 이러이러할 것이다. 모델이라면 어떨 것이다, 혹은 회사영업사원이라면 이럴 것이다 등등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면 이런 생각들에 지배당하곤 한다.
하지만, 또 최근의 짝짓기 프로그램이 재미있는 것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출연자들의 개성이 강렬하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틀을 깨는 모습들이 수시로 쏟아져 나온다. 그런 것들을 보는 와중에 프로그램 참여자도, 시청자도 각자의 휴리스틱을 이용해 직업을 듣고 대화 몇 마디를 통해 그들의 삶과 생각 등을 재단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이런 정보가 정확할 리 없다.
그런데도 출연자는 누군가에 빠져들고, 시청자도 좋아하는 이들의 편을 들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건 먼 얘기도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빠르고 위험스런 판단은 수시로 이뤄진다. 하기야 필자도 아무 말 없이 직업만 말하고 웃고 있으면 대단히 사람들의 내면을 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는 오해를 종종 받는다.(직업적으로 노력은 하지만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는 자주 헷갈린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타인을 파악할 때도 직업을 활용한다. 심지어 지금 당장 어필이 어렵다면 ‘과거에 뭘 했던 사람’인지까지 등장한다. 부정확하고 때로 위험스럽기까지 하지만 인지적 노력을 줄이고 싶은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직업은 나름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 안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연히 “된다”로 나 역시 답하겠지만 누군가를 늘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냉정하게 판단해 가늠하는 것은 아쉽게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들여 모두를 관찰할 여유가 없으니 각자의 휴리스틱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오해와 갈등은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과정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