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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하 Oct 22. 2021

'의미'의 의미를 찾아서

내 삶의 의미 찾아 삼만리

 정말 재미있게도, 나는 오늘 아침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의미!"라는 단어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기 직전에 나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의미'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자기 전에 생각하고 자면 꿈속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다는 성공한 이들의 조언을 따라 자기 전에 '의미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입력하고 잔 것도 아닌데, 내 무의식은 다짜고짜 해답부터 내놓았다. 내가 아무리 자면서 꿈을 많이 꾸고, 꿈을 통해 나의 무의식과 소통하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무의식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모닝 페이지와 요가를 열심히 한 덕분인가? 싱싱해진 내 정신 에너지가 밤에도 열심히 무의식의 바다를 헤엄치며 내가 원하던 '의미'라는 보물을 건져 올려 아침부터 선물해 준 것이다. 인생의 비밀을 깨달은 이렇게도 상쾌한 아침이라니!


 사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무의미 속에 방치하고 싶지 않아 얼마 전에 '퇴사'를 하였다. 어차피 힘들기만 한 게 인생이라면, 남은 인생은 의미 있게 살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사직서를 진짜로 던져버렸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나의 '시간'을 사들였다. 월급쟁이는 월급으로 그 달의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데, 나는 앞으로 돈을 벌지 못하니 당장의 월세, 당장의 공과금, 당장의 생활비 등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충당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내 시간을 직장에 팔아서 번 돈으로, 다시 또 내 시간을 사들인 셈이랄까? 결국엔 0으로 수렴되는 제로섬 게임처럼 느껴져 '손해는 아니지?' 하다가도, '명백한 손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판 시간은 20대 전부와 30대 초반의 쌩쌩한 젊음이었고, 지금 내가 얻은 시간은 30대 중반이란 어정쩡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억울하니까, 나는 또 긍정의 합리화를 해버린다. '그래, 자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하루를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소진되는 것, 소멸되어 가는 것일 뿐이야. 그걸 깨달은 대가로 치른 비용이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이런 인생의 비밀을 삼십 대 중반에라도 깨달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가야지. 삼십 대 중반이면 아직 한창이다!'


 그렇게 사들인 1년이란 시간, 모아 두었던 돈은 앞으로 나에게 1년 이란 시간을 선물했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일이 두렵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없었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도 없었다. 나는 파충류의 뇌가 원하는 것들만 스스로에게 갖다 받쳤다. 12시까지 늦잠 자기, 햇살 속에 산책하기, 영화 몰아 보기, 평일에 여행 다니기, 저녁에 술파티, 요리해 먹기, 가족과 시간 보내기, 마음껏 책 읽기, 일기 쓰기와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돌보기 등. 나는 바쁘게 살아가던 직장인의 삶과 아주 멀어진 채로 오로지 나와의 시간에 몰두했고, 그러는 동안 나를 심란하게 하던 과거의 상처들과 후회, 미련의 안개는 점점 걷혀나갔다. 참으로 살만한 날들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좋은 날들을 보내는 중에도 문득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시간들이었는데, 완벽하게 행복해야 하는데 뭔가 하나가 빠진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생활비가 다 떨어진 1년 후의 생활이 걱정되어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생활비를 벌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보고,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서 먹고살 수 있겠지란 마음으로 불안을 잠재웠다. 하지만 허전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아직 내 꿈을 이루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소설가로 등단하고 싶다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것이긴 하지만, 사실 퇴사 후 두 달이 지나도록 아직 본격적인 소설 쓰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허전한가 보다 생각했었다. 퇴사 후의 자유를 만끽하느라 한동안 정신 줄을 놔버렸으므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글을 쓰며 살아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 일과표도 작성하고, 모닝 페이지 쓰기, 미라클 모닝, 루틴 지키기 등을 통해 하루를 성실히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한 날들이 지속되었다.


'나는 의미를 찾고 싶어 퇴사를 한 건데, 계속 이렇게 허전한 마음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런 삶도 딱히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 원하던 소설가가 되어도 계속 소설만 쓰고 산다면 그건 의미 있는 삶일까? 소설가가 되어서도 이렇게 가끔 무기력하고 사는 게 허전할 거라면 그냥 직장 다니며 돈이나 벌고, 꿈은 취미로 남겨둘걸 그랬나? 결국엔 직장을 다니든 꿈과 씨름을 하든 어차피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진실이 무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아찔한 생각들로 하루를 살아가던 중에, 바로 오늘 아침 '의미'의 택배 상자가 집으로 배달되어 온 것이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거칠게 포장을 뜯어내었고, 배달된 상자 속엔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단어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이란 단어였다. '남'이라고도 부르는 그 타인은 그동안 나의 '의미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던 단어였다. '내가 왜 퇴사를 한 건데...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에 신물이 나서 퇴사를 한 거 아니었나? 인생을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어서 다 버리고 떠나온 거 아니었냐구!.' 나는 그 잔잔한 아침에 던져진 '타인'이란 파문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자기 삶의 의미는 타인으로 인해 완성된다'는 내 무의식이 내놓은 해답을 나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 맞나 싶었다. (밤새 안드로메다에라도 다녀온 것일까?)   

 나는 그동안 '꿈, 목표, 성장, 자아실현'같은 것들로 '의미'의 '의미망'을 채워온 사람이다. 내 꿈을 이루는 것, 내 목표를 이루는 것, 내가 성장하는 것, '나'라는 '자아'를 실현시키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이 의미 있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국어교사'라는 그 좋은 직장도 때려치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돼라'라는 무의식이 내린 명령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곧 일리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나는 나름 의미 있는 존재였던 것 같다. 나는 서른 명 넘는 아이들의 담임이 되어 하루 일과를 굴려갔고, 나의 수업이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나름) 열심히 수업 준비를 했다. 나와 상담한 아이들은 내게 위로를 받았고, 나 또한 귀여운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웃음 짓는 날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시간들은 다 사라졌다. 나는 집에서 밥이나 축내고 있고,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혼자 되지도 않는 글이나 쓰고 있는 신세였으니까. 그냥 예전처럼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짜증과 분노, 가끔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로 살아가는 게 진짜 '삶'인 것인가? 진짜 '人生'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역시 학교를 괜히 그만두었어!' 이런 생각이 마음속을 헤집어놨다. 엉엉.


 하지만 나는 곧 동거인과 대화를 나누며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말의 의미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무한한 수다의 대상이 되어주는 동거인에게 무한한 애정을 표하고 싶다! 나는 적어도 그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서 어찌나 다행인지!)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사실 '타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다.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를 의미 있게 여겨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즉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조금 문제다. 내가 챙겨야 할 가족들, 내게 맡겨진 일들이 가끔은 내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 부담의 무게만큼 나의 존재는 무거워진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호갱님이 되어주기도 하고, 스팸전화의 수신인이 되어주기도 한다!ㅎㅎ)

 하지만 역시 그런 것들로만 나의 의미를 채워나가면 나는 금세 소진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의미가 있으면서 남에게도 의미를 줄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직장에 다닐 때 나는 남에게 의미를 주었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은 하지 못했다. 퇴사한 지금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일만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남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니까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퇴사를 한 지금도 나는 '나와 타인'사이의 의미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남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남에게 의미 있는 글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좋은 글을 써서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좋은 글을 써서 번 돈으로 내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것. 결국 거기까지 나아가야 내가 내 몫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지? 그렇게 되어야만 나는 진짜 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게 되려나보다. 세상에, 내가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겠다 결심했다니, 새삼 내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긴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 나에게 찾아온 '의미!'라는 목소리는, 결국 "놀지 말고 글 좀 열심히 써! 당장 브런치북을 완성하고 빨리 소설을 쓰란 말이야! 그렇게 해서 언제 글로 돈 벌래!"라는 내 무의식의 준엄한 꾸짖음이었던 것이다. ㅠㅠ 의미의 비밀을 알아낸 상쾌한 아침이라고 생각했는데, 꾸지람을 들은 아침이었다니. 무의식이란 놈은 정말 의뭉스러운 녀석임이 틀림없다.       

 



** 안녕하세요~ 오늘 목요일 연재는 글 발행이 많이 늦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발행을 하네요. 무의식의 꾸지람을 듣고도 소용이 없나 봅니다. 그래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많으니까요! (긍정의 합리화^^) 항상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들 무의식과 깊은 대화 나누는 새벽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당신만의 하루를 사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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