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뒷모습이 아름다운 거인
1. 오리서원과 역행자
경기도 광명시, 이제는 고층 빌딩과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오리서원의 마당에 그늘이 길게 드리워졌다. 강연을 마친 나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강연장에 모인 공직자들은 누구 하나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창밖, 인조 임금이 하사했다는 작은 집 '관감당'에 머물러 있었다. 84세의 노대신이 삿갓을 쓰고 빗물을 받던 그 초라하고도 위대한 공간.
"여러분,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지며 강연을 마치려 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중력 아래서 삽니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고, 더 많이 채우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400년 전의 이원익은 그 중력을 거슬러 '비움'으로써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남긴 것은 수만 평의 땅이 아니라, 백성들의 입에 풀칠을 해준 대동법과 영웅 이순신을 지켜낸 정직한 목소리였습니다.“
2. 손등 박수가 남긴 울림
나는 내 손등을 가볍게 쳤다.
"아까 제가 제안했던 이 '손등 박수'를 기억하십니까? 손바닥을 쳐서 남을 칭찬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손등을 치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원익 대감은 평생 자신의 손등을 치며 살았던 분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비가 새는 방에서도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 당당함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그를 '오리 대감'이라 부르며 그리워하는 이유입니다."
강연장을 나서는 청중들의 발걸음이 이전보다 조심스러워 보였다. 어떤 이는 관감당 툇마루에 잠시 앉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서원 마당의 늙은 오동나무를 쓰다듬었다.
3. 아영이에게 보내는 답장
서원을 빠져나왔을 때 내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딸 아영이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아빠, 강연 잘 끝났어? 아까 내가 물어본 거 생각해 봤어? 존경받는 사람은 뭐가 다른 거야?]
나는 서원 입구에 세워진 이원익 대감의 영정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를 띤 채, 나는 한 자 한 자 정성껏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아영아, 존경받는 사람은 앞모습이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떠난 뒤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란다. 자신이 가진 것을 비워서 남의 가슴을 채워준 사람, 세상의 중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옳은 길'을 걸어간 사람. 아빠도 오늘 그 거인의 뒷모습을 보며 큰 숙제를 하나 얻었단다.]
전송 버튼을 누른 내 머리 위로 바람이 불었다. 400년 전 광명 오리마을의 숲을 흔들었던 그 바람일지도 모른다.
서원을 나서는 내 머릿속에는, 관감당의 낡은 현판이 오후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를 넘어 전해지는 거인의 안부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화두였다.
"그대는 지금, 어떤 중력을 거스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