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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Sep 19. 2023

눈이 멀었다.

22,000자 집필의 후유증

2018년 4월 5일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오후 1시쯤 운동을 갔다가 락커룸에서 갑자기 왼쪽 눈 시야에 하얀 반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반점들이 커지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거 예삿일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바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온갖 걱정이 들었지만, '글 쓰는 거 어떡하지? 나 뭐 하면서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앞이 안 보인다는 두려움, 그중에서도 글을 못 본다는 두려움이 미친듯이 공포스럽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응급실에서도, 안과에서도 바로 원인을 찾지 못했다. 한 6개월 정도 지나고 나서야 눈 안의 혈관이 직각으로 꺾인 채 터져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원인을 찾았다며 해맑게 좋아하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원인을 찾기까지 정말 온갖 고민에 휩싸이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왜 눈이 이렇게 되었을까. 많고 많은 신체부위 중에 왜 하필 눈일까.

생각해 보니 눈이 안 보이기 이틀 전, 나는 지금까지 통틀어 가장 많은 글을 썼었다. 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22,000자를 써 내려갔다. 나는 보통 한 시간에 1,000자 정도 쓰는데 그날은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그 당시 2개의 웹소설을 동시에 쓰고 있었는데, 그날 22,000자를 쓰고서야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생애 처음 그렇게 많은 글을 쓰고서 너무 행복해서 어느 때보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근데 그 글을 쓰는 동안 내 몸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눈이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안 보이고서야, 작가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온갖 눈 영양제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3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하다.

물론 글 쓸 때도 눈을 보호하기 위해 종종 쉬는 타임을 갖는다. 모니터의 빛이 안 좋으니 안경에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도 넣고, 저녁에 나가서 꼭 자연의 풍경을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20대 때보다 오히려 롱런하며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눈이 멀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지금도 종종 있다. 언젠가는 앞이 보이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작가로서 글을 너무 많이 써서 눈이 멀어봤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종종 하고는 한다.

눈이 멀고서 느낀 점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도 안 되고, 그 일에 내 정신이 잡아먹혀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즐기되, 건강을 생각하며 적당히 쉬어가기도 하는 완급조절이 중요하다는 걸 보이지 않던 눈을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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