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오?
세월이 흐르면서 웹소설 생태계도 바뀌기 시작했다. 플랫폼이든, 출판사든, 제작사든 웹소설과 대본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작가를 찾는다.
웹소설을 잘 쓴다고 해도 대본을 쓸 줄 모르면 꺼려하는 곳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대본을 배우러 2024년 4월부터 방송작가교육원(이하 방작원)에 가게 되었다.
웹소설을 쓴 지는 10년이 넘었기에 글을 쓰고 스토리를 짜는 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방작원에 가는 게 두렵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나는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글 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했고,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수 있으면 금상첨화. 딱 그 정도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웹소설과 시나리오는 '글'이라는 공통된 그룹에 속해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달랐다. 쓰는 작법도, 다루는 소재도, 캐릭터의 감정까지도.
그러다 보니 방작원을 다니는 내내 정말 허덕허덕 거리며 매주 보낼 수밖에 없었다.
1. 작법
웹소설의 작법은 간단해야 한다. 장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함축적이지 않아도 된다.
웹소설도 소설이기에 지문, 대사, 생각 등으로 글을 구성한다. 다만, 최근 트렌드에 따라 지문은 3줄 이상 넘기지 않는 게 좋고, 대사로만 주구장창 스토리가 흘러가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대사의 경우 최대 5번 정도 오가는 걸 추천하는데 이 모든 게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가독성을 위해서다.
웹소설은 글 쓰는 장르 중에 제일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지문 속에 생각이 들어가도 되고, 소지문으로 빼도 된다. 지문에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나 극중 캐릭터는 모르는, 하지만 독자와 작가만이 아는 비밀을 넣어도 된다.
대사의 경우에는 그렇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물론, 웹소설에서도 명대사가 있으면 있을수록 좋지만, 그게 필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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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드라마의 작법은 더 어렵고 까다롭다.
드라마 시나리오는 지문을 극혐 한다. 특히 이제 갓 데뷔하는 신인작가에게 지문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웹소설의 편집 때는 작가와 편집자만 거치는 반면, 드라마 시나리오는 제작사 담당자, 제작사 대표, 드라마 PD, 배우, 투자사 등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그러다 보니 개입이 엄청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지문을 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소리는 ‘그래서 이걸 PD가 어떻게 연출할 건데?’ 와 ‘그래서 이걸 배우가 어떻게 연기할 건데?’ 다.
여담으로 이건, 내가 '핏빛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분노한 듯 더욱 붉게 빛났다’는 지문을 썼다가 들은 소리였다. 그래서 드라마 지문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감정을 쓰는 소지문 조차도 (분노) (눈물) (웃음) 등 대표적인 감정만 쓰는 걸 작가를 제외한 모든 담당자들이 선호한다.
노희경 작가님처럼 어마어마한 지문 끝에 '내뱉는 한 마디' 라고 쓰는 건, 그 정도의 대작가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대사의 예술이다. 대사로 모든 걸 표현해야 하고, 대사 한 마디에 담긴 의미의 무게가 상당하다. 그래서 드라마는 유독 명대사가 많이 나온다. 과거 10년간의 사건이 대사 한 마디에 표현되기도 하고, 인물의 심리가 단어 하나에 좌지우지한다.
신기한 건, 드라마와 영화는 같은 영상매체인데도 시나리오가 판이하게 다르다. 영화는 시나리오도 감독이 쓰다 보니 지문이 상당히 길다. 전, 란의 경우만 봐도 지문이 2페이지를 넘어간다.
어차피 시나리오를 쓴 감독이 찍을 거기 때문에 그렇게 길어도 상관없다. 그러다 보니 대사도 대사지만, 그걸 연기하는 배우의 아우라, 감정, 주변 상황으로 빈 여백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대사가 굉장히 짧고 임팩트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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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공부가 1년 반을 미친 듯이 괴롭혔다. 너무 다른 두 세계를 오가면서 양쪽에 전부 만족하는 글을 쓰는 게 정말 어려웠다.
과연 웹소설과 시나리오를 모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이지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둘 다 쓸 수 있는 작가를 요구하는 사람을 만나면 한 마디 하고 싶다.
"거,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