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것들을 자주 미뤄둔다.
아껴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나중으로 보내버린다.
아이 첫영성체 선물도 그랬다.
진작 사줄 수 있었는데,
“조금 더 여유 있을 때”,
“제대로 골라서”라는 말을 앞세웠다.
명동성당에서 미사포를 고르며
그 말들이 결국 변명이었다는 걸 알았다.
왜 나는 늘 한 박자 늦을까.
기쁜 일 앞에서도 준비가 먼저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예쁜 노트는 비워둔 채 쌓아두고,
아끼는 그릇은 특별한 날을 기다리다
결국 잘 쓰지 않게 된다.
하고 싶었던 말도,
지금 해도 될 위로도
“나중에”라는 말 뒤로 밀어놓는다.
마치 기쁨에도
순서와 자격이 필요한 사람처럼.
아마 나는
충분해진 다음에야 누려도 된다고
오래 믿어왔던 것 같다.
조금 더 안정되면,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면,
그때 가서.
하지만 인생은
그 ‘충분한 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준비되지 않은 날에
툭, 하고 기쁨을 놓고 간다.
아이의 웃음,
길에서 우연히 먹은 고로케,
아무 말 없이 안아주는 사람의 체온.
그 앞에서 나는 자주 망설였다.
지금 이 정도로 좋아해도 되나,
이 상황에서 기뻐하는 건 사치가 아닐까.
아껴둔다는 말은
어쩌면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기뻐했다가 잃을까 봐,
온전히 누렸다가 다시 평범해질까 봐.
그래서 나는
좋은 것들을 ‘지금’이 아닌
항상 ‘나중’에 두었다.
스스로를 대기 상태로 만들어가면서.
최근에서야 조금 알겠다.
좋은 것을 미루는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계속 아직은 아니라고 말해왔다는 걸.
그래서 요즘은
아주 작은 것부터 바로 쓰려고 한다.
아껴둔 노트를 펼치고,
예쁜 컵에 커피를 따르고,
사랑한다는 말을 미루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아도,
지금의 나에게도
기쁨을 허락해보는 연습.
나는 앞으로도
종종 ‘나중에’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이건 정말 아껴두는 걸까,
아니면 또 한 번 삶을 미루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