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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Aug 14. 2019

외모 강박 문화에서 타협점 찾기


91년 대학 1학년 때 화장하는 애는 우리 과 여학생 30명 중 2명이었다. 나를 포함 대부분 아이들은 4학년 졸업앨범 사진 찍을 때 화장을 처음 해 보았다. 그때는 그게 자연스러웠다. 화장을 진하게 하는 걸 안 좋게 여겼던 듯하다. 청순한 이미지, 성에 대한 무지가 여자의 품격을 높였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상하고 근거 없는 생각이다. 이때는 쌩얼 여자 이미지가 고부가가치 상품이 아니었을까. 지금과는 반대로 화장하지 않을 것을 강요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농활에 대한 선배들의 안내를 듣고 봄에 참여했던 각종 시위(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시위를 하다가 전경의 강경 진압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91년도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한 시위가 주말마다 있었다.)에서 더 깊이 있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듯 설레었다. 미국의 ‘팩스 아메리카나’ 정책으로 시장 개방 압력을 가하고 있어 우리 농민들이 살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기초 배경 설명도 듣고 농민 속에 들어가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늘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했던 동기가 이번 농활엔 가지 않겠다 해서 의아했다. 


“은선아, 너 농활 왜 안 가?”

“얼굴 타잖아.”


헉, 단순하고 강렬한 한 마디에 아무 대꾸할 수 없었다. 농활보다 피부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 당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어쨌든 농활, 화이트 피부에 패(敗).     


그 후로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다. 중학생 때부터 화장하지 않으면 스스로 압박을 받는 분위기 속에 놓여 있다. 우리 반의 경우 한 반 여학생 12명 중 1-2명 빼고 다 화장하고 다녔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특히 여학생에게는 화장이 필수가 된 것 같다. 다른 반에 자기 소신으로 화장하지 않는 학생이 한 명 있었으나 친구들로부터 계속 질문을 받는 걸 보았다. ‘너는 왜 화장을 하지 않니?’ 화장하는 것을 기본값으로 한 질문이다. 그 학생만은 졸업할 때까지 화장을 하지 않았다. 전교에 단 한 명이었다. 학생들이 화장하지 못하고 바쁘게 등교한 날은 마스크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다가 쉬는 시간에 화장하고 나서야 얼굴을 드러낸다. 화장 천국.    


대학 4학년이 끝날 무렵에야 화장을 시작했던 나는 지금 어떠한가. 그로부터 20년이 넘은 현재, 스노우앱으로 찍은 게 아니면 내 얼굴에 만족스럽지 않다. 자외선 강한 여름이 지나면 피부에 생긴 잡티를 없앨 시술을 받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거기 들어갈 적지 않은 비용 걱정을 하면서도 정신 건강을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정신건강은 왜 매끈한 피부에 영향을 받게 된 것일까? 대학 때는 ‘화장하지 않기를 강요받고’ 지금은 ‘화장기 없이 외출하는 게 예의가 아니란’ 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이가 들면 잡티가 생기고 주름이 지고 살이 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50대가 넘어도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의 연예인이 TV에 나오면 ‘저건 너무 징그럽다’며 욕을 하면서도 ‘당신을 도자기 피부로 만들어 주겠노라’는 화장품을 찾는 모순. 카메라, 보정 앱에 번번이 패(敗).     


농활에서 하는 노동 체험, 학교라는 배움의 장, 현실을 그대로 담는 카메라는 예쁜 얼굴 앞에서 무력했다. 예쁜 얼굴이 왜 그리 중요한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남의 시선이 의식되어 억지로 하는 꾸밈은 노동이 된다.    



“만약 당신이 외모 강박과 싸우고 있다면 자신을 탓하지 마라. 아픈 문화가 아픈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니까.”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25쪽)    



대체 아픈 문화가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시대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가. 내 탓이 아니라 아픈 문화 탓이라는 걸 인식하면 행동을 바꿀 의욕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매일 끝도 없이 쏟아지는 완벽하고 비현실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에 파묻혀 있다. 여성의 얼굴과 몸의 몽타주는 극단적인 아름다움이 실제보다 더 흔한 것이라고 믿게 한다.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치는 동안 지금 우리가 매일 광고에서 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얼굴에서 거의 벗어날 수가 없다.” (같은 책, 238쪽)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인데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이라니. 그래서 여학생은 화장을 안 한 얼굴일 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나는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거울 앞에서 울상을 짓고, 젊게 보이는 시술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동안 파운데이션, 눈썹, 립스틱으로 끝나던 화장을 작년부터는 아이섀도, 아이라인, 마스카라, 볼터치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이미지에 홀린 거겠지. ‘깊은 눈매를 갖고 싶다, 생기 있는 얼굴이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 메이크업 원데이 클래스도 다녀오고, 거기서 강사가 사용했던 화장품을 집에 가는 길에 좌르륵 샀다. 집에 가서 두어 달은 유튜버 화장법 영상을 틈틈이 찾아봤다. 이사배, 김습습, 함경식, 유나. 유명한 화장 전문가들이 하라는 대로 연습하고 그들이 추천하는 화장품과 붓과 스펀지에서 골라 사서 나도 썼다. 진짜 좋은 건지 화장품 회사에서 로비받아 광고성으로 추천한 건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하기보단 편리했다. 정신없이 빠져 신경 안 썼으나 전보다 디테일해진 화장 하느라 시간도 많이 들었고 로드샵 브랜드 위주로 샀지만 돈도 꽤 많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외출 전 화장 시간이 20분에서 1시간으로 늘었다. 원하는 효과가 나타나서 내심 만족스러워 한동안 공들여하며 화장 시간 아까운 줄 모르다가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달라졌다. 수업 진행 규칙에 따르자니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글 한 편을 써야 했다. 좇아가기 바빴다. 학인들의 글을 읽고 댓글 놀이에 열중하면서 그 재미에 빠지다 보니 일주일 시간이 빠듯했다. 거기다 잘 놀려면 체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더 바빠졌다. 성공확률을 높이려고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내기를 추가했더니 뜻하지 않은 불이 붙어 서로 경쟁적으로 열심히 부지런히 운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욕심이 나 헬스 PT(Personal Training)를 20회 거금 100만 원을 들여 등록했다. 등 근육을 만들면 구부정한 어깨가 펴진다고 했다. 아름다운 자세로 걷고 싶다. 엉덩이 근육을 만들면 허리를 받쳐주어 허리 통증이 없어진다고 했다. 근력이 없어 재밌는 배드민턴 할 때 몇 게임 열중하고 나면 허리가 뻐근하고 다음날 끙끙거렸다. 좋아하는 운동을 오래 즐기며 하고 싶다. 하체 운동을 열심히 해서 다리가 튼튼해지면 여행을 다녀도 가뿐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도 내 몸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걸림 없이 이동하는 기능성 좋은 몸을 갖고 싶다.


완벽하고 비현실적인 여자의 몸매에 대한 환상에서 크게 벗어날 자신은 없다. 외모 강박 문화는 공기처럼 스며있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언제든 휘둘릴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내가 택한 적절한 타협점은 좋은 책 읽기와 좋은 사람 만나기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거울 앞에서 일어나 세상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좋은 책은 내 안의 편견을 깨는 도끼가 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게 한다. 책 이야기, 세상 이야기,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피부랑 옷 얘기는 조금만 하기로 한다. 나는 영혼을 흡족하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거울은 조금만 보고 책을 오래 보기로 한다.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란 지금의 나를, 예쁘게 꾸미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다. 나도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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