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잘 당하는 유형

누군가가 날 구원해 줄 거란 환상을 가지고 있나요?

by 하원

BGM : 이런 엔딩 - Nell ver.




이런 엔딩을 꿈꾼 적 있다.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가 지구 어딘가에 반드시 살고 있고, 언젠가 우린 만나게 되고, 그를 만나면서 지금의 불행과 고난이 모두 막을 내리며 내 인생도 180도 바뀌면서 계속 행복하게 살게 되는 꽉 닫힌 해피엔딩.




구원자와 피구원자, 지켜주는 자와 지킴을 받는 자.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생이 역전하게 되는 삶을 꿈꿨다.




드라마와 로맨스 소설을 많이 본 까닭일 수도 있고, 그때의 나한테는 나를 지켜 줄 어른이 필요하다고 느껴서일 수도 있다.


환상이란 걸 알면서, 진심으로 바랐다.




행복할 자격이 나한테도 감히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자질이 내 안 어딘가엔 숨어 있지 않을까 소망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기만 한다면 매일 반복되는 끔찍하게 외롭고 고달픈 삶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밤 달과 별을 보며 백마 탄 구원을 꿈꿨다.




주변에 사람은 많은데, 그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느낌.


적막할 때, 안심하고 안온해지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공허에 침묵하며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내지르곤 했다.




공기 중에 떠 있는 무음이 겉으론 화목한 나의 세계와 너무 닮았다.


그 무음은 아무도 모른 채 썩어가는 내 영혼에는 무관심하고 그저 책임을 다하고 있다 말하며 자기 자신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어른들과 닮았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구도 뼛속까지 공허한 내 눈과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랑받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받아먹지 못했다. 내 영혼은 텅 비어 갈수록 메말려갔다.




사랑을 주어도 받아도 갈증만 더 커질 뿐이었다.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원하는 사랑을 언제쯤이면 받을 수 있을까 가늠해 보다, 그게 뭔지 나조차도 모르는데 타인이 어떻게 알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나를 왜 이렇게 빚은 것일까.

세상에 신이 있다면,
왜 나를 태어나게 하여,
이 절망과 고통과 좌절을 겪게 하는 걸까.

이토록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어디서도 이방인처럼,
스스로가 외계인인 것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별종처럼 느끼며 살게 하려면
왜 나를 창조한 걸까.

왜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희망을 붙잡게 하는 걸까.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아무리 물어도 그 누구도 답변해주지 않을 질문만 내가 하고 있는 건지, 답변을 해줄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인지 매일 답답한 마음에 흐느껴 울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숨을 골랐다.




그러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헌신하고 그를 지키며 그의 어떤 힘듦이든지 덜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때마다, 구원받은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원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환상이었겠지만.




그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에게 별명을 지어 주며, 가깝게 지냈다. 꽤 오랜 시간 그는 내 인생에서 내 삶을 지탱하는 전부였다.




어쩌면 이때 만든 환상이 계속 나를 괴롭게 했던 것 같다.




내가 사회 안에서, 가정 내에서, 학교 내에서 바랐던 보호와 소속감, 사랑의 방식을 그한테 주려고 노력했다.




점점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하고 걱정이 됐다.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애를 썼다.


그러다 결국 내가 먼저 멀어지기를 택했다. 두려움을 먼저 피하기 시작한 발단이었다.




내 안의 고독 때문이었다.


같이 있다 보면 홀로 외딴섬에 남겨져 있는 것처럼 더 고독해졌다.




외로움은 줄어들 수 있지만, 고독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군중 속의 고독을, 그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그 누가 알아차리고 헤아리고 껴안아 줄 수 있을까. 그 누가.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준대도 그는 나의 외로움을 품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다 사랑해 줄 것처럼 왔다가도, 내 잠식된 고독의 크기를 엿보곤 금세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다.


그게 다 뭐야.




내가 만든 벽을 어떻게 허물어야 할지, 이미 받아서 쌓여 있는 상처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종종 화를 냈다.


나도 나를 잘 몰라서 어떻게 하질 못하고 있는데, 내 상처가 별 것 아니라 칭하는 사람은 뭘 안다고 아는 척 하나 싶어서 싫었고, 그걸 몰라 보는 사람은 무심해서 싫었다.




나의 일면이 아닌 어떤 나라도 사랑해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씁쓸하게 한 번 더 웃었다.


감정이 메마를 때까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애써 웃어 보였다. 영혼이 문드러질 때까지 활짝 웃다가 모두가 잠든 새벽에 숨 죽여 울었다.




나는 무엇을 사랑했을까.


사랑받을 줄도, 사랑할 줄도 몰라서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낭만적인 환상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그게 현실이 될 거라고는 감히 가닿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조금이라도 행복하면 불안해졌다. 얼마나 큰 불행이 올까 싶어서 행복을 걱정했다.




나는 무엇을 주었을까.

내가 사랑했던 그는
나에게 무엇을 줬을까.




'너'만 있고, 내가 없는 관계에서는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는 건 어른이 아이에게 할 일이지 그에게 나눌 마음이 아니었다.




구원은 없다. 구원은 사람으로 오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의 고독을 뚫고 내 전부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나 스스로가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누군가 날 사랑해 준다고 해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마음에 어떤 진심이 담겼는지.




나는 나를 구원해야 했다.


나를 변화시키고 구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사랑을 다시 배워야 했다.


회피할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삶으로 살아내면서.




나의 고독을 보살펴야 했다.


구원해 줄 백마 탄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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