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BGM : 삐삐 - IU
영화 <부당 거래>의 아주 유명한 명대사가 있다.
"내 얘기 똑바로 들어!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상대방 기분 계속 맞춰 주다 보면은
우리가 일을 못한다고.
알았어요?!"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그를 겪으면서 깨닫게 됐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에서도 상철 선배가 홍설 조에 무임승차하는 바람에, 홍설이 혼자 감당하느라 버거워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딱 그런 경험을 한 적 있다.
나는 홍설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은데, 몇몇의 친한 친구들 말고는 친밀하게 지내는 게 어려웠다.
두루두루 알고 지냈지만 그렇다고 쉽게 다가오지도 못하게 거리를 뒀던 거 같다.
누구한테 도움을 청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내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걸 많은 상황에서 수치스럽게 여겼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지해야 하는 상황조차도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고 과하게 책임지는 경향도 있었다.
숨 한 번 쉬고 그냥 내가 하고 말지, 나의 약한 모습을 내비쳐야 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실제의 나보다 더 능력 있고, 쿨하고, 활달하고, 매력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번아웃은 수시로 찾아왔다. 뭔가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금방 무력해지는 내가 황당했다.
예민하고 눈치도 많이 보고 자격지심도 있었다.
누가 누굴 칭찬하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거나 신경이 쓰이면, 우선 단점부터 찾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속으로 나를 혼내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갑자기 내가 조장을 맡는 걸로 분위기가 모아져서 조장을 맡은 적이 있다.
하기 싫었지만,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자료를 취합해서 PPT를 제작하는 걸 맡았다.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늦게 보낸다면서 나무위키를 복붙 한 내용을 보냈다.
본인 학점이 달린 문젠데 어떻게 '네가 알아서 잘해 봐'라는 식으로 과제를 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 자료를 일일이 더 찾아서 보강하면서 준비했다.
이름을 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기 때문에 차마 빼지 못했다.
발표만은 피하고 싶었던 차에, 그가 먼저 발표를 하겠다고 했는데,
발표 전날, 그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발표를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멘붕이 왔지만 알겠다고 쉬라고 했다.
발표 대본을 쓰고 밤을 새워서 외웠다. 결국 내가 발표까지 맡게 됐다.
무대에 올라갔는데,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준비했던 말을 더듬거리고 거의 울먹이면서 겨우겨우 발표를 끝냈다.
준비하느라 마음고생은 있는 대로 했는데, 완전히 망쳐 버렸다.
발표하는 중간에 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계속 조롱하고 비난하고 희롱했다.
가뜩이나 긴장돼서 미치겠는데, 그 소리 때문에 너무 수치스러웠다.
무대 위에 서 있는 게 벌벌 떨리고 공포스러웠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는데, 왜...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끔찍했다.
왜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는지 그 아이들에게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몰려 있는 아이들이 무서웠다.
그리고 내가 발표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갑자기 모두에게 주목받는 상황을 많이 힘들어하는 편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그는 여행을 다녀왔고, 아프다고 하고선 친구랑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사실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과하게 호의를 베풀고, 상대의 기분을 맞춰 주다가 된통 당했다.
과하게 허용적이었다.
그건 미래의 결과를 책임지는 게 아니라, 나를 얕보이는 행동이었다.
나를 만만한 호구로 생각하게 내버려 둔 것이었다.
다짐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호구가 되지 않겠다고.
나의 선을 분명히 보이겠다고.
착한 사람으로 보일 필요가 없다고.
나를 좀 더 앞에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