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안경 - IU
오랜만에 MBTI 검사를 해봤다.
몇 년 사이에 T와 F가 바뀌었다.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었는데, 최근엔 늘 비등하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로워졌다.
이성과 감성을 상황에 따라 알맞게 꺼내어 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졌을 땐, 타인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의아했다.
내가 너무 무감각하고 메마른 건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기엔, 나는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내 기분을 내가 맞추기도 힘들 만큼 다소 예민한 성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기분도 계속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보다 예민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드물었는데, 그는 감수성 DNA가 날 때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기분까지 헤아리려니, 삶이 피폐할 만큼 피곤해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내 기분과 감정까지만 책임지면 되는데, 그의 기분과 감정이 변하는 것도 내 책임으로 착각한 탓에, 그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많이 휘둘렸다.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책임지려고 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떠안아서 조율하고 이끌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고, 마감일은 닥쳐오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계속 일을 진행하면서, 그가 나서기를 기다렸다.
처음엔 장난과 농담으로 눈치를 줬다.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그는 나한테 화를 내고는 채팅방을 나가버렸다.
서로 기분만 상하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일에 더해서 그가 해야 할 일까지 전면에서 다 처리하고 있었고, 계속 내가 그 일을 떠안을 판이었다.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해서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창과 칼, 방패의 싸움이었다.
설득하려는 자, 떠넘기고 회피하려는 자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그가 기분이 상한 점에 대해서는 내가 실수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나만큼 잘 해낼 자신이 없으니 역할을 바꿔 달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내가 아직 그릇이 작은 탓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섣부르고 미숙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한사코 말리며,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에게 매뉴얼을 일일이 적어서 알려 주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그는 서투르지만 제 몫의 역할과 책임을 최선을 다해 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 그릇에 담기엔 너무 큰 사람이었다.
그의 제안으로 팀이 모이던 날, 다들 없는 시간을 내서 모였는데, 그는 오후에 친구와 노는 약속을 잡아놨었다. 세부 사항을 조율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다.
그는 결국 약속 시간에 늦었고, 분위기가 싸해질 정도로 불쑥 크게 화를 내곤 가버렸다.
그래도 그를 도와서, 여차저차 다사다난했던 프로젝트를 잘 마쳤다.
그는 내 주변 사람들과도 아는 사이였다.
친구가 어쩌다 보니 그와 같이 공연 준비를 하게 됐다.
준비하는 동안에, 그가 자신에게 물건을 던져서 맞을 뻔한 적이 많을 정도로 대뜸 화를 내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본인과 친한 사람일수록 폭력적인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쉽게 사과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타입이었다.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의 감정과 역할을 대신 해결해 주는 건 내 몫이 아니다.
공들여 감춰둔 약점을 짓궂게 찾아낼 필요도 없다.
어디에 속해있든, 적당히 피곤하게 살고 싶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책임지는 게 마땅한 정도만.
내 예민함을 적당히 상쇄시켜 줄 수 있는 명랑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애쓰지 않고 따라 웃을 수 있게.
웃고 있는 표정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해 보지 않아도, 진심이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들과 인생의 더 많은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
숨김없이 솔직하게, 많은 배려와 응원을 얹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의 곁으로 가고 싶다.
피곤한 사람은 피곤하게 살게 내버려 두고.
나는 나대로. 나라서 피곤한 만큼만 감당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남의 감정과 역할은 내 것이 아니란 진리를 명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