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을 빌려주고, 넌 내 지갑이란 말을 들었다.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는 말

by 하원

BGM : 잘 지내 - 윤하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춰주는 편이었다.


누구랑 같이 있느냐에 따라서 나는 꽤나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만나는 사람의 온도, 취향, 성향, 성격에 따라 자유자재로 카멜레온처럼 옷을 바꿔 입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춰 주는 게 내 성격이라 생각했다. 보통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겉보기엔 내가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받아주고 있는 사람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고, 나는 계속 두드렸다.




마치 상사의 컨펌을 기다리는 부하 사원처럼 행동했다.


어느 누구에게든 맞춰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점들을 쉽게 알아차렸고, 거기에 맞춰서 나의 스탠스를 정했다.


상대에게 맞추는 게 나의 고유함이었다.


그래서 1:1 상황이나 소수와 함께 있을 때 매력이 도드라졌다.




그와는 낄낄과 깔깔이 가능했다.


연락하면 바로바로 답장이 와서 심심할 틈이 없다는 것도 좋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연락하는 사이인 것도 좋았다. 언제든 연락해서 약속 잡고 만날 수 있는 것도 편했다.

힘든 얘기도 툭 털어놓으면, 가벼운 고민이 되었다. 때로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기도 하며, 불안을 덜어내는 시간들이 좋았다.




갈등이 생긴 건,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서부터였다.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그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다. 4명이서 모였다.




처음엔 당구장에 갔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다.




눈치를 봐서 두 사람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그 사람의 눈도 못 쳐다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서 두 사람이 가까워질 계기가 생기질 않았다.




다음엔 정말 못해서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보드게임을 하러 갔다.


계속 내가 졌다. 자꾸 포커스가 내 쪽으로 왔다. 불편했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그 사람이 카페에 가고 싶어 한다고, 같이 가달라고 사정해서, 같이 카페에 갔다.


그와 나란히 서서 2가지 메뉴 중에 고민하면서, 그에게 뭘 먹을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뱉었다.


"네가 사줘야 돼...
나 돈 없어..

네가 내 지갑이잖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네가 사줘야 돼... 제발..."


이라며 간곡하게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대로 굳었다.


곧이어 집에 가고 싶어졌다. 우선 그의 얼굴을 안 보고 싶었다.




내가 집에 가게 되면 벌어질 일들을 떠올렸다.


다른 두 사람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는 음료를 못 마시게 되겠지.


상황이 몹시 복잡해질 것 같았다.



결국


"너 이미 나한테
5만 원이나 빌려 쓴 거
기억하고 있지?

근데 그렇게 말해?

장난이 너무 심하네.

나 진짜 지금 집에 가고 싶은데,
저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네가 좋아하는 애가 여기 있으니까,
그 생각에 내가 딱 한 번 참는 거야.

내가 굉장히 화났다는 거 알고 있어.
나랑 나중에 다시 얘기해."


라고 말하고 계산을 해주었다.




눈치 작전으로, 그와 그 사람을 나란히 앉혀 주었다.


이제 두 사람이 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서로 대화를 하고 게임을 하게 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손목 맞기 게임을 하자고 그 사람이 제안했다. 그는 누굴 때리는 것도 맞는 것도 싫다면서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을 같은 버스를 태워 보내고, 혼자 집에 걸어갔다.


가는 길에 그에게 전화가 와서 받았다.


그 사람은 자리가 있었는데도, 그와 나란히 앉지 않고 띄어 앉았다고 했다.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가는 동안 아주 잠깐 밖에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고 속상해했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있는데 날씨마저 자기 기분 같다고, 크게 낙담해했다.




오늘 나는 뭘 한 건지 맥이 빠지고 현타가 왔다.


종일 광대처럼 본래보다 5배는 높은 텐션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큐피드 역할을 하고, 지갑이라고 불리고, 돈도 썼는데 감정만 상했다.




그를 타박했다.


네가 속상한 건 이해하지만, 오늘 네가 노력하지 않은 건 사실이라고.


하도 사정해서 자리를 만들어줬으면 그다음은 그가 노력하는 게 필요한데


나만 바라보고 있고,
나한테 다 의지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난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게다가 너의 말에 감정도 상했다고.




내 말에 그가 영혼 없는 사과를 건넸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그날 새벽, 본인이 고백했다고 말했다.


근데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고백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건 여전히 그 사람이지만 본인이 힘들 때마다 챙겨줬던 사람에게 고백했고, 받아줘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근데 벌써부터 후회가 되고 힘들다며 내게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다.




잠결에 읽고 이게 무슨 소린가, 잘못 본 거겠지 싶어서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읽어 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너,

내가 다시 연락할 때까지
나한테 연락하지 마.”


라고 말했다.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친구를 봐서라도,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딱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한테 빌렸던 돈을 갚았다. 그 뒤로 누구에게도 사적인 돈거래는 하지 않는다.




그는 어쨌든 애인이랑 한동안 잘 사귀는 듯 보였다.


한 일주일에서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계속 사귀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애인과 헤어졌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그는 새로운 애인을 사귀었다 헤어지길 반복했다.




한 5개월쯤 지나서 그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이제 완전히 정리했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그는 또 웃으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그 사람에게 고백했다고 말했다.


마음이 없어졌을 때에서야 고백할 수 있는 듯했다. 황당했다.




그는 술을 마시면, 새벽 2-3시에도 전화를 했다.


아무나 전화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하고, 카톡 하고 문자를 테러하고, 전화를 받으면 했던 말 또 하고 또 했다.




혼자 있는 잠시를 못 참았다. 혼자 남겨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점점 받아 주기가 질려 갔다.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계를 정리하지는 못했다. 같이 있을 때, 티키타카가 되는 재미를 놓지 못해서 관계를 좀 더 질질 끌고 갔다. 내가 바꿔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묘하게 나를 따라 하는 게 느껴지면서부터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옷 입는 스타일이나, 물건을 따라 샀으면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가치관이나 취향, 신념, 그리고 말투, 카톡을 보낼 때 일부러 내는 오타 등 잘 바뀌지 않는 것들을 갑자기 180도 바꿔서, 나랑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흉내 냈다.


나랑 정반대여서 부딪혔던 문제에서도 갑자기 나와 입장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고 자꾸 강조했다.




불편했다.


‘한 두 번 그러다 말겠지, 내가 좀 예민한 거겠지.’


싶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와 그를 모두 알고 있는 친구들도 그가 자꾸만 나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 말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졌다.




불쾌해져서 그에게 따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따라한 게 아니라고 잡아뗐다.




조목조목 따지자 결국 실토했다.


‘내가 자유로워 보이고, 내 멋대로 사는 것 같아서 내가 되고 싶어서 나를 따라 한 게 맞다’라고.




그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 전혀 미안하다는 진심이 안 느껴지는데, 선심 쓰듯이 사과를 했다.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계속 물어보자, 그는 자신이 사과했으니,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물고 늘어져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나를 나무랐다.


그에게 카톡으로 절교를 선언했다.




그를 끊어냈지만 떨쳐내지 못했다.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몸과 마음이 치가 떨렸다. 자다가도 열이 뻗쳐서 잠이 오지 않았다.

눈 떠 있는 동안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욕을 해야만 살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 이젠 제대로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그를 불러 냈다. 그는 나와 다시 친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 자리에 나온 것 같았다.




다시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울컥 올라오는 걸 꾹 참고,


"나는 너의 모든 게
다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대화할 일은 없을 거야.

그전에 얼굴 보고
마지막으로 끝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어."


라고 말했다.


그게 그와의 끝이었다.




이후에도 우린 계속 마주쳤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계속 삶이 흔들렸다.


원래도 이따금 삐거덕거렸던 마음이 그를 겪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이 전체가 다 송두리 채 흔들렸다.




배신감이 강렬하게 남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는 정작 너무 태연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못난 마음이 솟아 올라왔다.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도무지 사람을 믿기가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도 올라왔다.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지, 어떤 사람을 곁에 둬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인간관계를 하나씩 정리했다.


마음을 닫고 마음을 쟀다.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자주 쓰러졌다.




이흐로도 몇 년 동안은 새로운 사람은 만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만나지도 못했다.


누군가 가까이 오면 불편했다.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나한테도 실망했고, 누군가를 사귀기가 겁이 났다.


그보다도 나를 용서하지 못했던 거 같다.




애써 밝은 척했던 걸 버렸다.


본래의 차분한 내 성격을 다시 찾아왔다.




버릴 건 버리고 남길 것에서도 버릴 것을 골라냈다.


나한테 많은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다.




사춘기를 다시 겪는 느낌이었다.


매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어떤 사람을 원하지?',

'어떤 사람과 같이 지내고 싶지?'


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찾아갔다.




불능 상태가 됐던 나를 다시 쌓아 올렸다.


내가 무너졌던 건, 어쩌면 나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디에 발 디디고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점에 절망한 걸지도 모르겠다.


많은 순간이 후회로 와서 그토록 아팠던 건 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분노가 잦아들 때쯤, 내가 미숙해서 그에게 건넨 거칠고 모진 말과 날카로운 태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도 그에게 참 아픈 사람이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게 또 내 마음을 오랫동안 할퀴었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는데, 서로를 할퀴는 사이가 되어 헤어진 게 미안하고 아쉽다.




그와의 일들을 잊기가 힘들었던 수많은 밤이 있다.


많이 아팠다. 때문에 지쳤었다.


그와 가끔 마주치면 하루 종일 괴로웠다.


그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도망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오늘이 되었다.


이제 같이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볼 수 있다.


같이 있어서 즐거웠던 기억을 무지개처럼 떠올릴 수 있다.




이제 난 좀 괜찮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서 기쁘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재밌고 직접 자리를 만들 정도로 어렵지 않아 졌다.


누군가 나를 속일까 봐 걱정하는 마음도 없다.




난 이제 정말 잘 지내기 시작했다.


내일을 위해 잠들고,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는다.




나랑도 제법 친하다. 애쓰지도 않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마음과 사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서로에게 어쩌다 보니 아프고 아린 악연이 되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때 그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에서 그를 지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를 만나고 헤어지고 배운 게 많다.

덕분에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런 날들도 꽤 많았다.

덕분에 많이 성장했다. 그 덕분에 깊어질 수 있었다.




용서한다. 이제야.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다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데, 그리고 없었을까.


다시 친구가 되긴 어렵겠지만, 다시 만나면 인사와 짤막한 안부를 묻고 답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어른이 되고 있다.


나는 꽤 잘 지낸다.


날이 갈수록 더 나를 다루는 법과 나를 알아간다.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


잘 자고 잘 먹고 많이 웃고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잘 지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도 이젠 좀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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