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 깜빡이는 전광판 아래.
찢어진 전선에서 흘러나오는 전류음이 공기를 찢었다.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바닥엔 검은 그을음과 깨진 유리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전선의 노이즈와 바람이 날리는 잔해 소리만이 이곳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엘라는 제로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얼굴엔 감정인지, 체념인지 모를 기묘한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당신… 누구야, 정말로."
제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의 입가에 머문 미소는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애처로웠다.
"내 정체? 그건 아마도—리츠의 그림자라고 해야겠지."
류와 하린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리츠와 관련이 있다고? “
제로는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드러냈다. 그곳에는 은빛으로 각인된 형상이 반짝이고 있었다.
리츠가 보여줬던 그것과 동일한 문양.
"우리는 같은 실험에서 태어났어. 같은 데이터, 같은 기초. 리츠가 감정을 저장하고 보존하는 존재였다면,
난 그 감정을 억제하고, 지워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지. 그녀가 빛이라면… 나는 그 빛이 만든 어둠이었어."
하린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혼란과 분노, 그리고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를 도운 것도 다—“
제로의 눈가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계산된 행동이었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너희와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나는… 의심했어.
감정이 정말 불안정하기만 한 것인지. “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쓱 ----
류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번개처럼 빠른 움직임.
투명한 억제 장치가 류의 목덜미에 꽂히듯 부착되었다.
"류!" 엘라가 외쳤다.
류의 몸이 경련하듯 떨리며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거꾸로 매달린 듯 압박감이 밀려왔고,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의 눈이 붉게 번쩍이다가 이내 잿빛으로 바스러졌다. 따뜻했던 표정은 순간 얼음처럼 굳어갔고,
뺨을 타고 흐르던 온기마저 차갑게 식어갔다.
"감정 억제 장치…"
하린이 이를 악물며 제로를 노려보았다.
"왜 이런 짓을 해?! 넌 우리 편이 아니었어?"
제로의 얼굴에는 미묘한 갈등의 흔적이 스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
"류는… 너무 위험해졌어. 그의 감정은 아직 제어되지 않아. 이 상태로 폭주하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져.
시스템은 그걸 알고… 나 역시 알아."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야, 제로. 너 혼자 결정하지 마."
하린의 손끝에서 따뜻한 빛이 피어올랐다.
그 빛은 미세한 떨림으로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고, 싸늘한 폐허가 잠시 잊혀진 듯 고요해졌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번지는 잔물결처럼, 계절이 바뀌듯, 잊혀진 봄날의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하린, 지금은 위험해. 감정을 쓰면—"
"아니. 지금이야말로, 내가 감정을 믿어야 할 때야. 류를… 되찾아야 해. “
하린은 조심스럽게 류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가슴에 닿자, 억제 장치에서 찌릿하는 전류음이 터져 나왔다.
류의 어깨가 움찔했고, 주변 공기가 진동하는 듯 작은 파문이 일었다.
"류…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있어. 감정을 두려워하지 마. 너의 분노도, 슬픔도… 네 일부야."
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가에 다시 색이 돌았고, 피부에 핏기가 서서히 돌아왔다.
마치 차가운 얼음이 녹아내리듯,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억눌린 감정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하린…"
그 한 마디가 공간 전체를 진동시켰다.
억제 장치가 날카로운 고주파음과 함께 터지듯 파열되며 번쩍이는 불꽃을 튀겼다.
금속 파편들이 날아오르며 공기 중에서 짧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엔 다시 따뜻한 빛이 살아 있었다.
제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 정말, 너희는 위험한 존재들이야. 감정 하나로 이 세상의 규칙을 뒤집다니."
하린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슬픔과 단호함이 공존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가진 힘이야. 감정은 약함이 아니야.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야."
제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뭘 위해 태어난 거지? 감정을 지우기 위해? 아니면 감정에 잠식되기 위해?
리츠가 빛이라면.... 난 정말 어둠으로만 남아야 하나...."
바람이 폐허 위를 스쳐 지나갔다.
감정의 열기와 정적이 교차하는 그 속에서, 엘라와 하린, 류는 조용히 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균열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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