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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영 Oct 22. 2024

워라밸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feat. 직장 내 괴롭힘

업무와 삶의 균형

비가 오고 나서인지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진짜 가을인가 싶을 때 즈음 구름이 빠르게 걷히면서 아침 해가 불청객처럼 튀어나온다. 눈부신 햇살이 따갑게 느껴진다. 뜨거운 햇살이 아닌 따가운 햇살로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서일까. 따가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을 이어간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매를 맞듯이 입천장과 목구멍이 따갑다.


보통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 민감 건 관련 이슈는 대놓고 협박하는 사안이 아니다. 개인마다 다양한 상황에서 받아들이는 체감이 다르겠지만, 원인이 무엇이든지 정말 힘들고 괴로운 직장 생활이 이어질 경우, 대게 조용히 인사팀을 찾아가거나 무기명으로 신고를 한다. 신고인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경우, 다른 형태 혹은 추가적인 갈등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회사는 무조건 신고인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리는 공개적으로 신고를 천명했다.


둘 중 하나지. 뭔지 모를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협박이거나, 다혈질의 그녀가 생각나는 대로 마구 뱉어냈거나. 진짜 신고할 생각이었다면, 조용히 혼자 몰래 진행했을 거다. 그게 상식적이지, 하면서도 순간, 두 가지 다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막무가내로 이성을 내려놓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미쳐 날뛰는 그녀의 모습도 머리를 스친다. 하. 요것 봐라.


생각할수록 기가 차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불편하고 긴장되었던 마음이 갑자기 서운함과 분노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온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는다. 일부러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카페로 약속을 잡았다. 가능하면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날뛰는 일은 없어야겠기에.


"어, 세라 대리, 여기"


어색하게 손을 들어 박대리를 맞이했다. 찰랑이는 단발을 한 손으로 털어 내며 이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는다. 짐승 하나 마주하고 있다는 듯, 상당히 일그러진 표정이다. 장담컨대 지금 그녀는 나를 뱀으로 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데,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 것 저 것 주문해 봤어요."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얼그레이 쿠키, 조그만 딸기 치즈 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그녀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라고 요즘 친구들은 사계절 내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니까. 좋아하겠지.


"저 죄송한데, 카페인 끊었고, 다이어트 중이라 괜찮습니다."

어라,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아, 그래요. 그럼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요건 포장하지 뭐."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드릴 말씀을 드리고 가볼게요."

선빵이 좀 강력하다. 작정하고 나온 것 같고, 카페 미팅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인 듯 싶었다.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볼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 실마리가 생길 것 같다.


"저는 이번 채용 취소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되어야죠. 일만 하다 죽으라는 건가요? 사업은 확장하는데, 채용을 안 하면 일과 삶이 분리가 안되잖아요. 실적 핑계 대면서 분위기 주도하는 것은 본부장님과 팀장님이고, 사람은 안 뽑아주면서 제가 퇴근하면 눈치 주고, 휴가 쓴다고 하면 일정보고 뜸 들이다가 허가해 주고. 사람을 뽑지 않으면 계속 이럴 거 아니에요. 이런 게 다 직장 내 괴롭힘에 포함되는 거라고요!"


그녀가 흥분하기 직전에 내가 손을 뻗어 잠시 목소리를 낮추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취지를 알겠다. 예상했지만 과하긴 하다. 인권 침해의 수준으로 겁박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내가 아는 박대리는 업무성과나 역량이 평범한 수준이다. 동료들보다 워라밸을 더욱 신경 쓰는 사람인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나는 파레토의 법칙을 신뢰한다. 그녀는 회사를 이끄는 20%의 인재가 아니다. 대부분 80%의 직원들이 박대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직장 생활을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은 사실 마케터의 언어다. 이 트렌드를 통해 얼마나 많은 소비를 이끌어 냈는가. 등산, 테니스, 골프, 패션, 자동차, 차박, 캠핑, 서핑, 여행 등 수만 가지가 '삶'의 가치로 정의되면서 직장인들의 월급을 뜯어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가치를 존중하고 나름대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다만 워라밸이라는 트렌드로 포장되어 반드시 일정 시간 이상 보장받아야 하는 인생의 가치로 통용되는 사실이 불편할 뿐이다.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은 다시 말해,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대인을 역설한다. 일도 삶도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인생은 감히 장담컨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워라밸이 아닌 '워라하(Work - Life Harmony)'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다.


"박대리. 많이 힘들었구나. 박대리가 퇴근 시간을 눈치 보고 휴가 쓰는 것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 대한 불편함은 없도록 조치할게요. 상세하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차분하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채용 건을 번복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리님이 그렇게 느꼈다면 팀장 통해서 오해 없도록 정리할게요. 회사 사정이 그래서 이해 좀 부탁할게. 내년 초에는 꼭 채용할 거니까 너무 상심 마시고,.."


긴 대화를 하면서 (사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워라하'에 대한 나의 철학을 어필해 보고 싶었으나 틈을 주지 않았고, 이야기를 한 들 꼰대 소리 듣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일과 삶은 조화가 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부분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과 삶의 조화는 균형을 위한 시간 배분과 같이 물리적 접근이 아닌, 일이 삶에 스며들거나 삶이 일에 스며드는 화학적 접근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알게 모르게 상호보완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일에 미치는 것이 나쁜 게 아니다. 일로 바쁘게 사는 게 둔해 빠진 자본주의의 노예로만 비춰 버리는 일부 미디어의 시각을 경계한다. 그러지 않고서 성공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러면서 틈틈이 자기 취미를 개발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이 프로페셔널 직장인이다. 그래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나아가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성공'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저마다의 가치가 다르니 무엇이 옳다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과 삶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사는 직장인과 그것을 하나의 가치로 조화롭게 공유시키는 직장인을 단순 비교하더라도, 회사 입장에서의 '인재'는 누가 우위에 있을지 불 보듯 뻔하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 나름 거칠게 쏟아내는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나의 기분도 썩 좋진 않았다. 갈등을 중재하고 정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는 장본인으로 치부되었다는 느낌에, 마음이 헛헛하기까지 하니. 몸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직장 내 괴롭힘을 운운하던 박대리의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온 듯 느껴졌을 때 즈음,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돌려보냈다.


채용 인터뷰를 볼 때, 마지막 질문은 항상 회사에 궁금한 게 있는지를 묻는다.

그때마다 이런 질문을 듣곤 한다.


"워라밸은 보장이 되나요?"

바꿔 말하면 야근 없나요, 칼 퇴근이 가능한가요. 일이 나의 삶에 방해가 될까요.


나는 그때마다 활짝 웃으며 답한다.

"당연히 보장됩니다. 원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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