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리는 3년 전쯤, 내가 실장일 때 채용했던 사람이다.
서울의 상위권 인문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입사 지원을 했다. 보통 대학의 졸업생들은 전문직을 꿈꾸는 게 아니면, 대부분 대기업 공채를 지원하고, 그다음 유망한 스타트업, 그리고 강소기업, 중소기업 등의 순으로 자신의 미래를 덧대어 저울질한다. 아마도 그녀에게 우리 회사는 3순위정도였으리라. 어떠한 가치로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좋은 인상과 훌륭한 언변으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
입사 첫날, 새로 채용된 신입 다섯 명을 회의실로 불러 축하 인사와 함께 가벼운 면담을 진행했다. 긴장과 설렘이 회의실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게 답변을 잘하는 친구가 기특해서 물었다.
"세라님은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기획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기획자가 되고 싶어요,."
그녀는 찰랑한 단발머리를 하얀 손으로 쓸어 올리며 방긋 웃었다.
대부분 문과 출신의 새내기들이 하는 답변은 비슷하다. 기획자나 마케터. 이게 제일 전문직 같아 보이니까. 예상했던 답변이긴 한데, 그래서 어떤 기획을 이야기하는 거지? 모든 일의 앞 단에는 기획 업무가 붙기 마련이다. 사업에 붙으면 사업기획, 상품에 붙으면 상품기획, 영업에 붙으면 영업기획, 웹이나 앱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면, 웹기획/앱기획 등등. 더 질문을 이어갈까 하다가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만두고 그대로 긍정했다.
"아, 네. 좋네요. 생각하시는 대로 훌륭한 기획자가 되시길 바라요."
10여분 간 개인의 성장과 회사의 비전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회의실 문을 나섰다.
그리고 며칠 뒤, 곧바로 인사 조직 개편을 통해 신규 인력들을 배정했고, '박세라', 그녀의 이름은 마케팅 부서에 올려졌다.
얼마 후 코로나19 가 터졌다.
확진자가 나오기만 하면 사무실은 폐쇄되었고, 잠잠하다 싶으면 교대 출근으로 실제 출근 일수가 주 평균 3일이 안 됐다. 물론 재택근무를 하며 업무를 진행했지만, 집에서 하는 업무의 밀도는 낮았다. 피드백이 늦어지다 보니 일정들이 계속 밀리는 상황도 생기고, 급하게 전화를 하면 부재중도 많았다. 평소 같으면 많이 바쁜가 보다 싶었겠지만, 당시에는 피곤하면 낮잠을 잘 수도 있겠구나..로 생각이 변질되기도 했다. 그런 일상을 보내다 보니 우주를 유영하는 듯 흐느적거리는 무기력함이 뇌의 한편을 지배했고, 온몸을 지탱하던 중력이 약해진 탓인지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 세라님.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요. 잠시 자리를 비웠어서. 어쩐 일이신가요?"
어느 날, 그녀에게 부재중 전화가 한통이 와 있어서 콜 백을 주었다. 낮잠을 잔 건 아니었다.
"네, 실장님 안녕하세요. 팀장님 연락이 안 돼서 부득이하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슬랙(Slack)-업무커뮤니케이션/협업툴-으로 보고 드렸고, 빠르게 피드백을 받아야 정산 처리를 진행할 수 있어서요. 아직도 확인이 안 되시는 것 같네요.."
그녀는 상사의 업무 태도에 대해 비꼬는 투로 이야길 이어 나갔다.
"외주사와 홈페이지 분석 완료했고, 검색엔진최적화(SEO) 작업도 정리했거든요. 요청 주셨던 파워블로거 섭외도 완료되어서 외주업체 정산과 블로거들 일부 선입금이 필요한 상황인데,.. 연락이 안 되시니까,... 급하게 재무팀에 요청해도 팀장님 결제가 안되면 비용을 내보낼 수 없다고 하니 갑갑해서요.."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터질 것 같다.
"아, 그래요. 그 건에 대해서는 제가 재무 쪽에 이야길 해서 정리하고, 장 팀장에게 따로 확인하도록 할게요. 고생 많습니다 세라님."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녀가 '저기,..' 하며 못다 한 말을 더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지구의 중력을 지배하는 듯 강력하게 시간을 멈춰버렸다.
"실장님, 제가 3개월 정도 마케팅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사실 저는 기획이 하고 싶었는데, 계속 운영성 업무나 정산만 하니까,.. 이게 저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가끔은 마케팅 부서 업무가 아닌 단순한 민원 업무들까지 처리를 하게 되니까. 고민이 좀 되네요."
순간의 정적.
"음,.. 어떤 고민이죠?"
나는 이미 해답을 가지고 물었다.
"보직 변경 요청이나 퇴사,... 도 고민 중입니다. 다른 회사도 알아보고 있고요."
신입의 패기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나에게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녀는 협박에 능하다.
"네, 일단 세라님 생각은 잘 알겠어요.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퇴사를 고민하는 것은 세라님이 판단하실 문제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없을 것 같고. 보직 변경은 요청하시면 인사팀을 통해 정리되는 사안이니, 그건 진행하시면 그때 자세히 보도록 하죠."
또다시 정적,
잠시 후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라님이 생각하는 성장이라는 게 어떤 거예요? 지금의 일이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을 알고 싶어서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기획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의 일은 그냥 아르바이트 생이 와도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요. 외주 업체 커뮤니케이션 해서 보고서 받은 거 정리해서 재 보고하고, 검색해서 정리하고, 때 되면 정산하고 하는 일들이 저의 전문적인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평소에 느꼈던 불만을 3개월이 지나서야 쏟아내는 느낌이다.
나는 드디어 해답을 꺼냈다.
"네.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성장'에 대한 이야기예요. 성장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어제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 해결할 수 있으면 '성장'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세라님은 3개월 동안 충분히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네요. 처음에는 서툴렀던 본인의 업무를 지금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매끄럽게 진행이 안 되는 상황을 힘들어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기획'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금 세라님은 좋은 '기획'을 하기 위한 씨앗들을 뿌리고 계십니다. 업무의 내용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획을 하면 뜬구름 잡게 되어 있어요. 기획의 전제는 A부터 Z까지 업무 전체가 돌아가는 운영적 내용을 깊이 다룰 줄 아셔야 좋은 기획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훌륭한 기획자는 훌륭한 운영자를 거쳐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아이디어만 좋다고 좋은 기획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의 업무를 이해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관련된 다양한 조사를 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행동을 이해하고, 그다음이 아이디어입니다.
운영성 업무도 하다 보면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잖아요. 기획이 특별한 게 아닙니다. 부족함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게 '기획'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개선의 필요성을 간절히 원하는 운영자가 기획을 더 잘할까요, 아니면 기획자의 타이틀을 가진 누군가가 기획을 더 잘할까요. 당연히 실제 운영을 담당했던 사람이 개선의 목적과 실제 효율성을 분석하고 거기에 아이디어를 더해, 더 좋은 기획을 더욱 빠르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작은 기획들이 모이고, 경험되다 보면 운영 전반을 아우르는 '운영기획'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경험이 더 쌓이면 마케팅 프로젝트 별 기획을 할 수도 있겠고. 그러다가 지금의 장팀처럼 회사 전체의 마케팅 전략과 기획을 주도하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 세라님은 그런 기획을 해 볼 수 있는 씨앗을 뿌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되는데요? "
열정을 담아 이야기해 주었다.
잘 듣고 있는 건가. 또 답정너에 꼰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얼핏 하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 말씀 고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도 해주지 않아서요. 그런데 저는 저만의 전문 분야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문성 있게 업무를 진행하고 싶은데, 여기는 그냥 이것저것 다 하는 게,... 특히 민원 처리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콜 업무 하는 직원이 한 명 채용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또 한 번 느낀다.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사람의 뇌는 1초에 수백만 개의 감각 입력을 처리한다. 다만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감각은 40여 개 정도로 매우 제한적이다. 관심이 있는 것만 받아들인다. 내가 전기차에 꽂혀 있으면, 수천 대의 자동차가 도로에 지나다녀도 전기차만 유독 눈에 띄는 이유이다.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건 스스로 복기하지 않으면 불가하다. 각성을 위해서 그녀가 스스로 복기하길 기대하는 건 아직 무리일까.
"네, 의견 주신 건 고려해 볼게요. 다만, 지금 생각에 본인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업무들도 결국 톱니바퀴가 잘 굴러가기 위한 하나의 윤활제와 같은 요소일 것입니다. 그게 당장 눈에 보이는 톱니가 아닐 수도 있죠. 결국 그런 업무들이 세라님의 경험적 바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해요. 전문성은 이런 경험들이 바닥을 다져줘야 그 위에 세울 수 있는 겁니다.
모차르트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음악에 관심을 갖고, 소리에 관심을 갖고, 피아노의 음계를 익히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고, 연주 연습을 수도 없이 한 후에 악보를 그리고 작곡을 했을 겁니다. 그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1만 시간 이상의 시간을 음악 연습에 투자했어요. 지금 세라님은 마케팅이라는 톱니가 어떻게 회사 안에서 굴러가고 있는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정이 없이 결과만 쥐어지는 걸 기대하시는 것은 본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서 소개된 '1만 시간의 법칙'을 연설했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약 1만 시간의 집중적인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론인데, 이야기하다 보니 나 혼자 이야기하고 있다. 전화가 끊겨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렸다.
"아, 실장님. 죄송해요. 말씀하시는 중간에 장팀장에게 전화가 와서 급하게 받았습니다."
나도 전화를 끊고 싶었다.
"아 그랬군요. 어디까지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씀 주신 내용은 검토하도록 할게요."
"네 고맙습니다 실장님. 모차르트 이야기하시는데 전화가 와서,... 통화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팀장님이 승인해 주셨고, 바로 팔로업 한 후에 퇴근하겠습니다. 벌써 5시가 넘었네요."
참고로 퇴근 시간은 6시다.
"아니요 뭘요. 일단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무한 인사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내 말이 도움이 되었는지, 퇴근 시간이 다가와서인지, 아니면 팀장과 연락이 되어서인지 통화 초반과 달리 매우 밝아진 느낌이었다.
이 날 이후, 나는 신입 직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되도록이면 피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늘어놓고 조언을 해 준다 한 들, 직접 느끼고 경험하지 않으면 그냥 꼰대의 잔소리니까. 굳이 시간과 열정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며칠 후 걸려 온 인사팀장의 전화였다.
"실장님, 혹시 민원처리 업무하는 직원을 채용하라고 지시하셨나요?"
우주를 유영하던 나는 갑자기 엄청난 중력의 힘에 순간 중심을 잃었다.
오후 2시 40분. 초침이 더디게 움직이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