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인가 소통인가
쏴아.
남향의 사무실 창 너머로 비가 쏟아지더니 이내 번개가 번쩍한다. 나를 노려보던 마케팅 팀장의 시선이 잠깐 창으로 쏠렸다. 신이 날 돕는다.
"와. 엄청 쏟아지네. 낮에 그렇게 덥더니, 이제 추워지려나 보네. 소나기겠지?"
날씨로 대화의 분위기를 잠시 환기시키고 눈치를 본다. 뭔가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아, 우산을 안 가져와서 걱정하는 거겠지. 아니, 퇴근 시간에 차가 막힐까 봐 그런가. 채용 때문에 저 표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를 마음속으로 되뇌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일이 많아요. 이미 보고 드렸지만,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아서, 현재 수준에서의 업무량과 맨먼스(man-month) 확인해서 다시 전달드릴게요. 지금 상황에서 더 몰아붙이면 사고 터집니다."
마케팅 팀장은 일을 참 잘하는 친구다. 그런데 입만 열면 협박이다.
"장팀, 보고했던 내용들은 충분히 다 알고 이해했어. 업무량이 많은 것도 잘 알고 있고. 인원이 부족해서 채용을 하겠다고 한 것을 허가했던 것도 나고. 그런데 회사 실적 조정이 되어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 생기다 보니 계획 수정이 필요해서 요청하는 부분이에요. 비용 절감이 필요할 때 회사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게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장팀이 더 잘 알 거 아냐? 불편하겠지만 이해 좀 부탁해요."
"아니, 그래도 이미 제이. 디(Job-Description) 인사팀에 다 전달해 놓고, 애들 고생하는 거 조금만 더 참고 서로 챙기자고 이야기하는 중인데.. 지금 연말에 박람회 2개나 있고, 파트너사 행사도 팔로 업해야 하잖아요."
박람회라고? 파트너스 행사?
엇! 순간 머리를 스치는 기가 막힌 해결책이 떠올랐다. 이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랄까.
"장팀, 혹시,.. 지금 채용하려는 인원이 박람회와 행사 운영을 하는 업무 롤도 포함된 인력이에요?"
"당연하죠. 그 두 개만 해도 2.5 맨먼스는 될 겁니다."
"아, 그럼 박람회와 파트너스 행사 둘 다 드롭시키는 걸로 정리하고 현재 업무에만 집중합시다. 대표님께는 내가 따로 보고할게."
"네???"
묘안은 이렇다.
박람회와 파트너스 행사는 잠재 고객 유치와 원활한 사업을 위해 중. 장기적인 네트워크 구축에 도움을 주는 마케팅이지 당장의 매출을 증가시키는 마케팅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예산만 줄여도 최소 3억은 줄일 수 있겠다. 여기에 채용까지 내년으로 넘기면, 일단 미션 컴플리트. 마케팅 팀장의 숙제만 남았다.
"장팀, 드롭시킨 행사 관련 업무를 줄이고, 현재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R&R(Role & Responsibilities) 짜고 과업관리를 잘해주세요. 대신 현재 업무 중에 당장 매출과 직결되는 키워드나 쿠폰, SNS 마케팅 예산을 조금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할게요. 직원들 잘 다독여주시고, 김팀에게는 따로 직원들을 위한 가벼운 사내 이벤트 같은 거 지원해 달라고 했으니까 같이 상의해 보시면 좋을 거 같네."
마케팅 팀장의 두꺼운 뿔테 사이로 찌푸린 이마와 눈매가 보였지만 애써 외면했다. 나는 휘파람이 불고 싶었다.
",... 네, 그럼 일단 버텨볼게요.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연말 행사 때문에 채용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포화상태예요. 행사드롭으로 채용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행사는 이벤트성이라 일이 더 생기는 것을 채용된 인력으로 최대한 커버한다는 취지였어요."
아무래도 지금의 결정이 마케팅 팀장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상황이 갑갑하겠지. 고집도 생기고, 자존심도 상하겠지. 더 따지고 싶었지만 나중으로 미뤘다. 내가 팀장일 때, 이런 결정들이 다분히 폭력적이라고 느꼈을 때도 있었으니까. 감정이 앞서면 갈등이 심화된다. 직장 안에서의 소통은 늘 어렵다.
"알겠어요, 장팀. 내년 초에 바로 채용은 할 거니까, 3개월만,.. 버텨봅시다."
나는 마케팅 팀장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에게 난 토끼였을까 뱀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