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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 Aug 02. 2023

엘찰튼 5일째


l과의 아침 통화를 마치고 점심 꺼리를 사러 숙소 밖을 나섰다. 숙소에서 들으면 늘 강한 바람 소리에 을씨년스럽지만 막상 나가보면 그리 춥지는 않다. 그저 두꺼운 점퍼를 하나 걸쳐 입고 바람만 막아주면 그만이다. 내가 나흘밤을 보낸 이 숙소는 파타고니아의 자그마한 마을 엘 찰튼의 언덕 위에 있었는데 여기에서 시내 중심가를 가기 위해서 걷다 보면(그래봐야 10분 걸린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지금까지 본 마을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피츠로이 주변의 산들과 지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도 널찍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다. 단지 깨끗하고 이쁘기만 했다면 도시빈민의 취향을 거슬렀겠지만 트래킹을 기반으로 하는 산장마을의 느낌이 있어 흙길에 터프한 산장 같은 집들도 많아 편안하다. (특히 시내에서 떨어진 언덕 위의 집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비수기라 마을 전체를 돌아다녀도 다음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손질하고 있는 건설현장 말고는 거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이 없는 널찍한 거리는 깨끗하고 평온했다. 겨울 산과 호수를 트래킹 하고 쉴 수 있는 이곳은 오히려 적당히 을씨년스러워서 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여행 막바지 아무도 없는 대로를 아주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 것이 참 좋았다. 상점들도 닫혀있었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와 마을을 독점하고 있는 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2박 이상을 잘하지 않는 이곳에 오래 머무르기로 한 결정은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일생일대의 풍경을 음미할만한 시간 정도는 필요했다. 다른 곳을 갔다면 그곳에서도 무언가를 찾아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 절경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작은 마을은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어 더 흥겨웠다.

  

지금은 오전 11시. 여기를 방문한 소수의 사람들도 대부분 저 피츠로이 산이나 라구나 토레로 걸어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시간이다. 뭐 그래봐야 그 산속에서도 10명 안쪽의 사람들 밖에 보지 못할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일생의 최고의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말이다. 비록 나는 정말 한 번은 죽겠구나 싶었고 매일 20km 이상을 걷고 해질녘에야 가까스로 숙소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첫 산행 후 튼튼하기로 정평이 난 바리케이드 테니스화의 내부가 변형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곳은 넘어오는 순간부터 심상치 않은 곳이었다.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찰튼 가는 길은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우유니 주변의 황량함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면 좋으려나? 황량하면서도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고 적당히 목초지들도 있고 소나 양도 뛰어논다. 풍경의 변화도 꽤 다양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30시간 이동 후에 보면 지겨워지기 마련이고 오랜 버스여행으로 지친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라고 하며 잠에 들기도 했다. 그러다 2시간쯤 지났는데 내 앞자리 여자분이 반대쪽 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뭔 일인가 싶어 살펴보았더니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갑자기 정면에 거대한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고 호수 뒤로 거의 270도가량 병풍처럼 파타고니아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버스는 서서히 그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호수와 황량한 초지와 설산이 굉장한 조화롭고 아름다워 연신 감탄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거야? 마침 겨울이라 산들은 모두 눈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른쪽 끝부분에 빨갛고 요상하게 생긴 뾰족한 큰 봉우리 하나 작은 봉우리가 두 개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저 봉우리가 바로 세계 5대 미봉이라 불리는 피츠로이였다. 3대 5대 그런 말 잘 믿지 않지만 피츠로이는 정말 딱 봐도 정말 아름다웠다. 위로 뾰족하게 튀어 오른 모양뿐만 아니라 색도 눈에 띄게 붉은색이었다. 만약 저 봉우리가 없었더라도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끝에 피츠로이가 엣지를 주고 있었다. 완벽했다. 걷거나 오토바이를 빌려서 이곳으로 돌아와 이 풍경을 마음껏 느껴보고 싶었다. 창문 없이. 이 주변 지대를 트래킹 하는 것은 10년 전부터 남미여행을 하고 싶던 내가 바랬던 바로 그것을 보여줄 것 같았다. 버스는 마치 피츠로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은 터널 같은 엘찰튼 마을의 오손도손한 불빛 아래로 스며들어갔다.

  

2일째 피츠로이 트래킹


숙소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다소 피곤했지만 바로 피츠로이 트래킹을 떠났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날씨를 체크하고 여기를 왔는데 도착한 일요일이 완전히 맑았고 월요일부터는 구름이었고 목요일부터는 비나 눈이었다.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일출 시 불타는 피츠로이를 보기 위해서는 3대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을 한국 블로그들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건 파타고니아의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많은 한국인들이 칼라파테에서 모레노 빙하를 보고 당일치기로 피츠로이를 등반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며칠 동안 관찰한 결과 다른 봉에 비해 이상하게도 피츠로이 봉이 구름에 잘 가리는 것도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첫날 트래킹도 그렇게 험한 코스는 아니었다. 엘찰튼의 트래킹 코스들의 장점은 험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한 것을 보상해 주는 점이다. 편도 10km 정도로 코스는 긴 편이지만 마지막 1킬로미터를 제외하고는 험하지도 경사가 심한 편도 아니다. 중간중간 피츠로이의 독특하고 웅장한 모습을 다양한 거리와 각도와 배경으로 볼 수 있어 가는 길도 지루하지 않았다. 가는 길도 찾기 어렵지 않았다. 예술적인 아르헨티나 인들은 길을 잃을만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길을 표시해 두었다. 주로 마른나무로 길을 막아두었는데 어느 넓은 개울가에서는 하얀 돌들을 일렬로 이어놓아 길처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이곳의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다는 것이었다. 파타고니아라고 하면 고산에 남극에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매우 추울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와보니 한국 기준으로 초봄, 초겨울 정도의 날씨 정도였다. 영상 5-6도에서 영하 2-5도. 그러다 보니 산행을 하기에는 얼음이 녹은 자리들이 질어서 곤란했지만 무척 편안했다. 발이 젖는 것은 눈길 산행을 하며 잠시만 축축함을 견디면 금방 마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꼭 걸어가야만 하는 발은 꽤 뜨겁다. 아마 이곳이 비수기인 이유는 아마 그런 기후에 대한 예상도 한몫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페루에서 산 두꺼운 점퍼를 벗고 라파즈에서 오천 원에 산 내피를 꺼내 입었다. 없어 보이는 옷이라 호신용으로 썼는데 산에서 입으니 제 기능을 찾은 듯했다. 가볍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 위로 여행을 언제나 같이하는 방수되지 않는 바람막이를 입었다. 그런데 그 주머니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알파카 장갑과 이어폰이 나왔다. 잃어버리곤 좀 기분이 상했는데 제때 나와 제기능을 다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마지막 1킬로였다. 경사가 심해 힘들었다는 후기를 많이 보았지만 해 없는 새벽에도 가는 길이려니 했다. 경고 표지판이 있는 초입에서 막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한 무리의 백인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한 여자분이 꼭 뭔가를 말해주려 했다. 지금 이 시간에 저기를 올라가는 것이 좋은 선택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너무 가파르고 미끄럽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늦게 출발해 그때가 3시를 향하고 있었다. 내 복장도 신발은 등산화가 아니었고 쓰레기 같은 가방을 메고(멕시코서 산 가방인데 진짜 그리 보였다.) 그곳에 등산점퍼도 아닌 점퍼를 매어두었다. 그래도 가려하자 그 여자분이 자신이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내게 주었다. 꼭 필요할 거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지팡이가 없었으면 오를 시도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오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 때문에 미끄럽고 가팔랐다. 마지막으로 내려가던 여자분이 도전해 보라고 worth it. 이라고 하고 내려 갔다.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할 가치가 있다는 거였을까? ㅋ


사람이 지나간 눈길은 정말 미끄러웠다.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길을 종아리나 무릎까지 발이 빠졌다. 그럼에도 지팡이로 지탱하고 최대한 천천히 한 발 한 발 옮겨갔다. 땀이 나고 무섭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길은 점점 가팔라져 과연 여기를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길도 지그재그로 선명했고 아직 표지판도 보였고 사람 발자국도 선명했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니 나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절반 정도 올라왔을 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경사가 아찔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올라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나중에 내려올 때는 어떻게 하지? 더 미끄러울 텐데.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은 아직 있었기에 좀 더 가보고 결정해 보기로 했다.


한발 한발 살얼음을 걷듯 조심해서 올랐다. 그러다 700미터 남은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눈 때문에 표지판도 거의 잠겨 있었는데 경사가 너무 가팔랐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10미터 정도는 올랐는데 너무 가팔라서 오를 엄두 가나지 않았다. 그때 깊은 발자국에 주저앉아 뒤를 내려다보니 아득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5분쯤 고민을 하다. 포기하기로 했다. 올라갈 수도 없었고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나. 700미터 지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게 더 문제였다. 자꾸 미끌렸고 아래가 보였다. 한 발을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바람도 심했다. 위험해서 자세를 낮추다 아예 앉아버렸는데 그런데 다행히 그게 꽤 괜찮았다. 걸어가는 게 아니라 썰매를 타듯이 중심을 뒤로 두고 신발과 지팡이로 제동을 하며 내려가니 꽤 갈만했다. 그때 왠지 여기에서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700미터 지점에서 여기서 그만두는 게 싫어 다시 고민을 했다.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오히려 사람이 밟지 않은 깊은 눈을 밟아보자. 그곳은 미끄럽지 않으니까. 의외로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직선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경사가 너무 심해졌다. 그래서 다시 포기하려다 이번엔 표지판이 없지만 지그재그로 사람이 밟지 않은 길로 걸었다. 돌도 적당히 이용했다. 그런데 딱 처음 포기한 그 지점 높이에서 눈이 얇거나 얼어 지탱이 되지 않았고 가팔랐다.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을 때가 3시 30분쯤 되었을까? 더 지체하기도 애매한 시간이 되었다. 다시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에 보지 뭐. 그러면서도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야 하니까 걸으려고 하는 순간 한 친구가 걸어오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내가 포기하려 한다 하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스위스인이었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우선 올라가라고 했다. 대신 어찌 올라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널 카피해 보겠다고 했다.


그는 성큼성큼 처음 실패한 코스로 걸어갔다. 경사가 심한 대서도 자세를 낮추긴 했지만 금방 올라가 버렸다. 멀리서 보기엔 너무 쉬웠다. 나중에 물어보니 스노보드 강사에 암벽등반을 했다더라. 어쩐지. 하여간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어 한번만 더 해보기로 했다. 같은 곳으로 올라갔고 처음 멈춘 그곳에서도 용기가 났다. 지팡이를 단도처럼 짧게 잡고 몸을 눈에 붙이고 기다시피 올라갔다. 미끄럽고 가파른 구간이 15미터쯤 되어 보였는데 그 위에 돌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오르니 다음부터는 꽤 갈만했다. 저 멀리 그 친구도 보였다. 봉우리 직전까지 오르자 넓은 설원이 펼쳐졌고 절로 왔더 퍽 이 나왔다. 일생 최고의 풍경이었다. 눈 덮인 피츠로 이봉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봉의 규모나 모양이 색 경사 적당한 구름. 바라보고 있는 거리도 너무 좋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망연했다. 그 친구가 있는 지점에 가서 당신은 나의 페더러라고 했다. 네가 없었으면 여기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좋은 친구였다. 잘 그러지 않는데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교환했다. 시간이 충분치 않아 길게 머무르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 마저도그친구와 많은 얘기를 하느라 충분히 음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럴만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려왔다. 그는 성큼성큼 내려갔고 나는 그냥 썰매를 구간구간 탔다. 그렇지 않아도 기워놓은 내 트래킹 바지는 장렬히 전사했다. 거대한 구멍이 3개나 생겼다. 나 대신 죽었다고 묻어줘야겠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7시가 넘었고 스파게티를 만들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스테이크까지 만들어 과식을 했는데도 자꾸만 먹고 싶었다. 바릴로체산 거대한 초콜릿을 먹고 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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