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도시, 엥겔베르크
루체른 역에서 혜진이를 다시 만나 저녁거리를 장만했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스위스인 데다 시내 한복판 중앙역 안에 있는 슈퍼마켓이라 그런지 엄청 비싸다. 셋이 먹을 빵과 샐러드, 햄과 치즈, 과일과 음료수, 과자 몇 개를 샀는데 60프랑이 훌쩍 넘어버렸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엥겔베르크로 향했다.
10분 정도 시내를 통과하고 나니 지하도로 들어간다. 역시 시 외곽지역은 터널로 연결된다. 중간에는 한쪽 벽이 트여 있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으로 볼 때 산이 높아 터널을 뚫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5분 정도 터널을 달리고 나면 시골마을이 나타난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가꾼 마을이다. 2-3층짜리 단독주택 창가에는 반드시 꽃이 놓여 있다. 세월의 흔적이 깊이 스며 있는 목조 외벽과 화려한 꽃화분들은 바로 뒤로 솟아 있는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스위스만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고속도로를 잠시 달리다 엥겔베르크 표지판을 보며 오른쪽으로 빠진다. 길은 왕복 2차선으로 좁아진다. 엥겔베르크로 들어가는 외길에 접어들었다. 양 옆으로 폭 4-500미터 정도 되는 초지가 펼쳐지고 그 뒤로는 깎아지른 산이 맞닿아 있다. 초지에는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초지 중간중간 전형적인 스위스 가옥들이 자리 잡고 있다.
“딱 봐도 스위스네.” 혜진이가 한마디 던진다.
“저기 낙하산이 내려오고 있어.” 앞자리에 앉은 혜나는 패러글라이딩을 본 모양이다.
“아마 저 풀밭으로 내려앉을 거야. 우리도 저거 함 해 볼까?”
고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혜진이는 질겁을 한다. “난 밑에서 소랑 놀고 있을게요.”
“난 좋아!” 역시 혜나는 겁이 없다.
알프스에서의 패러글라이딩은 생각해 놓은 액티비티 중의 하나였다. 마침 엥겔베르크에도 패러글라이딩 프로그램이 있어 연락처까지 알아 두었다. 시간을 어떻게 뽑아낼까 궁리 중이다.
초지를 가르는 직선도로는 10여 Km 이어진 후 산길로 접어든다. 빼곡히 들어선 숲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제법 가파른 경사로 산을 오른다. 제법 심한 곡선 주로가 이어지지만 차들은 속도를 줄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들 동네 주민들인 모양이다. 한계령이나 미시령 옛길을 생각나게 하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10여분을 달린다. 오른편으로 나무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계곡 건너편으로 험한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 위에는 만년설이 얼룩처럼 남아 있다. 산자락을 돌아나가니 이젠 왼편으로 만년설을 이고 있는 바위산이 나타난다. 굽이를 돌아갈수록 산 그림자에 가려 있던 어둑한 시야는 조금씩 밝아 온다. 맞은편 산자락으로 아직 남아 있는 오후 햇살이 비치고 있다. 거의 다 올라온 모양이다. 햇살이 앞 창 가득 부서져 쏟아진다. 햇빛 가리개를 서둘러 내린다. 빛을 받은 턱 밑으로 살포시 따스함이 전해온다. 알프스 고지대에선 여름 햇살도 힘을 잃는 모양이다.
이젠 내리막이겠거니 싶었지만 이내 바로 마을이 나타난다. 알프스 중턱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내비게이션은 엥겔베르크 초입에서 왼편으로 길을 안내한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고 중간쯤에 우리의 숙소가 위치하고 있다. 집 앞에 차를 세운다. 언덕 아래로 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 티틀리스 전망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역이 보인다. 저수지 왼편으로 엥겔베르크 시내가 내려 보인다. 최고의 풍경 한복판이다. 배가 고파 지쳐 있던 아이들도 숙소 주변 풍경을 보고 감탄을 연발한다.
숙소 주인에게 도착했음을 알리니 이내 금발의 아가씨가 나타난다. 이런, 맨발이다. 에어 비엔비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사진으로 암벽 등반을 즐기는 줄은 알았지만 근육이 다부진 씩씩한 아가씨이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숙소에 대해 안내를 받기 시작했다.
“환영해요. 엥겔베르크에 잘 오셨어요. 우선 정원부터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여기가 현관이고, 이 앞에 있는 게 메추리예요. 아침마다 알을 낳으니까 가지고 들어가서 요리해 드시면 돼요.”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앞마당에서 메추리를 키우고 있다니...
“그리고 이 쪽으로 와 볼래요? 여기는 민트 종류예요. 뜯어서 샐러드에 넣으면 향이 아주 좋아요. 이 옆에 노랑꽃은 매콤한 맛이 나요. 그 아래에 있는 풀도 잎이 매콤해서 샐러드에 넣어 먹으면 좋아요.”
풀이나 야생화를 좋아하는 혜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알려 주는 이파리마다 맛을 보고 좋아한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둘러 트렁크들을 가져와 거실에 집어넣는 동안 주인 아가씨는 그물로 넓게 막아 놓은 마당에서 옆에 있는 나무 새장으로 메추리를 옮기고 있다. 비도 오고, 해 떨어지면 오소리나 너구리들이 메추리를 잡으러 오기 때문이란다. 혜진이와 혜나 모두 나서 메추리를 옮기느라 분주하다. 메추리가 쪼아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해맑게 웃고 있다. 아직 실내는 안내를 받지도 않았는데 벌써 집주인과 친해져 버렸다. 넓지 않은 마당이지만 나무에 묶어 놓은 해먹도 있고, 바비큐 그릴도 있다.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꿈과 같은 환경이다. 게다가 손님을 반기는 고양이 필루까지.
실내 역시 깔끔하고 아기자기하다. 아들과 딸이 자랐을 법한 침실 두 개, 더블 침대로 변하는 소파가 있는 거실과 바로 이어져 있는 부엌. 부엌에는 온갖 종류의 향신료들이 갖춰져 있고, 아홉 가지 정도 되는 식용유들은 구경도 못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캡슐 커피 머신과 토스터,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꼼꼼하게 사용법을 일러주고 주인 아가씨는 위 층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루체른은 별로였는데 이 집은 최고네요.”
“난 루체른은 구경도 못하고 그냥 왔네. 혜나야, 루체른 별로야?”
“너무 덥고, 사람도 많고, 초콜릿도 시시하고... 그냥 그랬어. 여기가 훨씬 좋아.”
“얼른 저녁 준비해서 먹자. 배고프다. 샐러드에 넣게 혜진이는 나가서 민트 좀 뜯어 와라.”
빵과 샐러드와 햄과 치즈와 요구르트, 그리고 스위스 맥주가 어우러진 저녁 식탁에서 바젤에서 길을 찾아 허둥댄 혜진이의 이야기, 루체른에서 고생만 하고 온 혜나의 이야기, 20년 전 루체른에 홀딱 반했던 아빠의 이야기가 한참을 이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혹은 따로 각자의 여행을 즐기고 있다. 도착해서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젠 천둥 번개가 되어 아주 가까이 내려치고 있다. 알프스 산속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