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디자인, 디자인
부지런히 달려 도착한 곳은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에 붙어 있는 비트라 캠퍼스 Vitra Campus이다. 혜진이가 바젤을 가보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 나와 혜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디자인 쪽에서 비트라의 명성은 대단한 모양이다. 주소는 파일 암 라인 Weil Am Rhein이라는 독일의 도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회사는 스위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위스 관광청의 바젤 안내 페이지에도 비트라 캠퍼스에 대한 안내가 자세히 나와 있을 정도이니.
의자로 시작해서 가구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한 세계적인 디자인 가구 메이커라는 혜진이의 설명을 들으면서 캠퍼스로 진입했다. 캠퍼스라는 표현에 걸맞게 넓은 대지 위에 띄엄띄엄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서너 시간 남쪽으로 달려왔다고 햇살이 뜨겁다. 가을에서 여름으로 옮겨온 느낌이다.
“이 캠퍼스 안에 공장도 있고 물류 창고도 전시장도 있고 미술관도 있어요. 다 보려면 이틀은 잡아야 해요. 전시장 하고 미술관 말고도 물류 창고와 공장도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들이라 놓치면 안 된대요.”
건축에 관심이 많은 디자인 전공생 혜진이는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모양이다. 의자에서 등을 떼고 차가 멈추면 바로 뛰어내릴 태세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그럴 만도 하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설계)의 최초 건축물 '비트라 소방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해외 첫 작품 '비트라 뮤지엄'
안도 타다오(Ando Tadao, 원주 뮤지엄 산 등 한국에도 많은 작품이 있음)의 해외 첫 작품 '콘퍼런스 파빌리온'
건축에는 문외한인 나도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 게다가 그들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서기 전의 작품들이라니 더더욱 비트라라는 회사의 디자인 내공이 높아 보인다.
잔디밭 위에 마련된 주차장엔 은근히 차가 많다. 줄을 맞춰 나무가 심어져 있기는 하지만 제법 따가운 중부 유럽의 햇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듯싶다. 혜나는 초콜릿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초콜릿들이 녹을까 봐 벌써부터 울상이다. 최대한 나무 그늘에 많이 가려지도록 차를 세우고 디자인 전시관인 비트라 하우스 VitraHaus로 향했다. 여러 개의 컨테이너를 아무렇게나 포개 놓은 듯한 건물이 재미있다. 각각의 컨테이너 끝에는 널찍한 창이 나 있다. 테라스처럼 비죽 삐져나와 있는 컨테이너 밑으로 마련되어 있는 입구로 들어선다.
흰색으로 꾸며진 널찍한 로비 공간 왼편으로 디자인 샵이 꾸며져 있고, 오른편으로는 카페테리아가 위치하고 있다. 깔끔하고 간결하지만 심심하지 않다. 모자라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디자인의 힘이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2층부터 시작하는 전시관은 거실, 침실, 식당 등 가정의 공간뿐만 아니라 사무실, 응접실, 회의실 등 다양한 공간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파스텔 톤으로 단순하게 꾸민 공간 속에 감각적으로 조합된 가구들과 각종 인테리어 소품들, 너른 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 이 모두가 한데 어울려 누구나 탐을 낼 수밖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비빔밥이나 회덮밥처럼 각각의 재료들의 맛이 튀면서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푹 고은 삼계탕 속에서 풀어지다 남은 마늘쪽이 풀어내는 향처럼 은은하게 각각의 특징들이 섞인다. 특히 프랑스 풍의 포도밭이 펼쳐진 언덕을 배경으로 꾸며 놓은 거실은 누구라도 소파에 앉아 잠시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앉아 쉬면서 이 공간이 내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세련된 디자인의 가구들 사이로 종이로 만든 원형 등기구,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메모 보드류의 소품들, 특히 구석구석에서 깨알같이 자라고 있는 다양한 식물들이 이 공간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혜진이와 혜나는 둘이 붙어 다니면서 서로 사진 찍어 주느라 바쁘다. 나 역시 참고할만한 사진을 남기기 위해 분주히 셔터를 누른다. 어느 앵글에서든 허전한 구석이 없다. 역시 디자이너들의 치밀함과 그 속에 녹아 있는 수고가 읽힌다.
각각의 공간은 계단으로 이어진다.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있고, 공간을 통째로 이용하는 계단도 있다. 다양한 형태들이 이질감 없이 공간을 연결하고 있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비트라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의자들과 함께 재미있는 소품들이 놓여 있어 심심하지 않다. 도중에 만난 신문지 전지 크기의 스케치 북에는 혜진이가 혜나의 표정을 그려 놓기도 했다.
혜진이가 원하는 바젤과 혜나가 가고 싶어 하는 하이디 마을의 중간쯤 되는 엥겔베르크가 오늘 머물 곳이다. 비트라 하우스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점심식사를 하며 나머지 일정에 대해 의논했다. 초콜릿이 염려스러운 혜나는 차를 타고 이동하고 싶어 했고 혜진이는 비트라 캠퍼스의 나머지 건물들도 보겠다고 한다. 결국 혜진이가 비트라 캠퍼스를 마저 보는 동안 혜나와 나는 루체른을 돌아보고 저녁 시간에 루체른 중앙역에서 만나는 것으로 또다시 여행을 나눴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중 폰의 알림을 확인하며 혜나와 함께 주차장로 가던 중이었다. 와이파이가 잡히질 않는다. 어쩐 일이지?
“혜나야, 와이파이 켜져 있는지 확인해 봐.”
“잠깐만요... 엥... 아까 언니가 들고 다녔는데...”
큰일이다. 혜나와 나는 주로 와이파이 중계기에 의존하고 있었고, 혜진이는 현지 유심칩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 와이파이 중계기가 없으면 혜진이와 연락할 방법이 없다. 뒤돌아 보니 혜진이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현지 유심을 쓰고 있으니 전화도 안된다. 서둘러 비트라 하우스로 돌아오니 다행히 건물의 와이파이가 연결되었고, 혜진이와 연락할 수 있었다. 방금 미술관으로 들어갔던 혜진이로부터 중계기를 되찾고 우리는 루체른으로 향했다. 혜나의 초콜릿은 아직은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