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세 모녀 다시 모이다.
브뤼셀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오른다. 올 때 만났던 표지판 속의 도시들이 반갑다. 오후의 고속도로는 한가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를 잠시 거쳐 독일로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내비게이션 화면에는 그 나라의 중요한 교통법규가 표시되고 외교부와 통신사의 안내 문자가 도착한다. 와이파이는 네덜란드의 통신사를 잡는가 싶더니 독일로 들어오면서 다시 먹통이다.
“벨기에 어땠어? 혜나한텐 유럽 첫 도시였잖아.”
“최고! 역시 벨기에는 초콜릿의 나라야.”
“다시 유럽에 온다면 또 벨기에에 올 거 같아?”
“음… 가까운 곳으로 오면 다시 와보고 싶어. 하지만 멀리서 굳이 다시 찾아올 건 아닐 거 같아. 그 동네도 구경할 게 많을 텐데.”
“다음 휴가는 어디로 갈 생각이야? 유럽에 또 올 거니? 이번에는 프랑스는 구경도 못하잖아.”
“글쎄요, 다음엔 호주로 가볼까 생각 중임. 전혀 다른 계절로 가는 거 해 보고 싶어.”
아무리 봐도 혜나에겐 역마살이 있는 것 같다. 직장을 다닌 지 3년이 되어 가는데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일본, 보라카이 등 늘 어디로든 여행을 간다. 이번 여행 마치고 돌아가면 두 달 후에 친구와 제주도를 가기로 이미 약속을 해 놓았단다. 아마도 그 역마살은 집안 내력인 듯싶기도 하다. 나도 출사를 핑계로 거의 매 달 거르지 않고 여행을 다닌다. 당일이나 1박의 짧은 여행이긴 하지만. 아버지 역시 직장 다니실 때에는 산악회니 골프니 주말을 밖에서 보내셨고, 팔순이신 요즘도 거의 매일 산이나 둘레길을 찾아 나선다. 하루에 15-20Km 걸으시는 건 일도 아니시라나.
혜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와이파이가 연결됐다. 혜진이는 베를린에서 기차를 탔고 출발이 15분 정도 미뤄지는 바람에 도착도 그만큼 늦어질 예정이란다. 독일에서 기차가 연착이라니 왠지 낯설다. 혜나를 통해 채팅 내용을 들어보니 혜진이도 신나게 베를린을 즐기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또 나름의 재미가 있지. 오늘 저녁에는 자매간에 할 이야기들이 많겠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휴게소를 들렀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열광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독일이나 스위스, 벨기에도 마찬가지, 고속도로 휴게소는 단순 명료하다. 편의점과 식당 그리고 화장실 끝. 식당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마지막에 계산하는 방식인데 선택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비슷비슷한 메뉴뿐이다. 우리처럼 온갖 길거리 음식들이 손님을 유혹하는 일은 없다. 우리 휴게소가 온갖 도표나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는 참고서라고 한다면 유럽의 휴게소는 무미건조한 교과서라고나 할까?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첫날 묵었던 숙소를 다시 찾았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서 잠시 쉬고는 혜진이를 픽업하러 프랑크푸르트 남역으로 향한다. 어스름한 노을 속에서 조명이 들어온 프랑크푸르트 남역은 처음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차가운 아침 햇살과 따스한 저녁 햇살의 차이만큼이나 저녁의 역 건물은 포근하다.
혜진이를 다시 만난 건 8시 가까운 저녁시간이다.
“저기 언니다! 와아~~ 언니!”
“와아~ 혜나야, 잘 있었어?”
고작 이틀만인데 자매의 상봉 장면은 눈물겹다.
“혜진아, 베를린은 구경 잘했어? 배고프지? 점심은 뭘 먹었니?”
“베를린 역 앞 푸드트럭에서 간단히 때웠어요. 배고파요.”
“그럼 근처에서 식당 보이면 이야기해. 거기서 먹자.”
“에이, 그래도 독일인데 독일 음식을 먹어 봅시다.”
“독일 음식? 어떤 거?”
“슈니첼.”
“난 부어스트.”
검색해 보니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평이 좋은 독일 음식점이 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도착해 보니 조용한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상가 거리. 잡화점들은 문을 닫았고 식당과 술집만 몇 곳 영업을 하고 있다. 주차를 하고 음식점을 찾았다.
거리에서 볼 땐 자그마한 식당이었지만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은 마당에 테이블이 가득하다. 대충 봐도 100명 이상 앉을 수 있을 듯하다. 평일 늦은 저녁인데도 상당히 북적거린다. 먹어보고 싶다던 학센, 슈니첼, 부어스트와 함께 맥주와 음료수를 주문했다. 혜진이의 베를린 이야기, 혜나의 벨기에 이야기로 자매의 수다가 시작된다. 전혀 다른 스타일, 전혀 다른 관심사의 두 여행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식탁 위로 두 자매들만의 유럽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 켠에는 벨기에 초콜릿으로 벽을 세우고, 베를린 동물원의 코끼리가 지붕을 받친다. 그 옆으로 펼쳐진 광장 위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자리 잡는다. 브뤼셀의 운하 위로 흐르는 보트를 타고 베를린 비엔날레의 작품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보다 보니 학센이 보이지 않는다. 학센이 빠지면 섭섭한데...
"저... 메뉴를 보다 보니 학센이 보이지 않네요. 학센은 안 하시나요?" 웨이터를 불러 물었다.
"이쪽에 있는 게 학센 종류예요. 어깨하고 허벅지가 있답니다."
"어떻게 다르죠? 어느 쪽이 더 맛있나요?"
"어깨가 맛있어요. 양은 허벅지가 많고요."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족발은 앞발이다.
제일 먼저 나온 슈니첼은 바삭한 튀김옷이 두텁게 입혀 있는 일식 돈가스와는 전혀 다른 비주얼이다. 차라리 대학시절 레스토랑 돈가스와 비슷하다. 조금 더 두텁고 부드럽고 훨씬 더 맛있다는 것 말고는. 경양식집 돈가스가 슈니첼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부어스트는 이미 익숙한 소시지. 두툼하고 노르스름한 껍질이 아바이 순대를 떠올리게 한다. 잔치국수와 스파게티와 마찬가지로 순대와 소시지는 같은 재료의 동서양 버전인 셈. 오리지널임을 일깨워 주는 식감과 풍부한 맛은 여기가 독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학센은 독일 올 때마다 먹어 봤지만 이번이 최고인 듯싶다. 학센은 족발을 껍데기 그대로 삶은 후 튀겨낸 요리인데, 예전에 먹었던 학센은 껍질이 억세고 단단해 먹기가 힘들었다. 단단히 말라 버린 누룽지의 느낌이랄까. 어렵사리 껍질을 걷어내고 나면 정작 살코기는 많지 않았다. 이번의 학센은 둘이 먹어도 충분할 만큼 살코기도 푸짐하고 껍질도 바삭하니 맛있다. 차만 아니었으면 맥주 서너 잔은 그냥 마실 수 있었을 텐데.
세 가지 요리의 사이드로 나온 음식이 제 각각이다. 슈니첼에는 감자튀김이, 학센에는 삶은 감자가, 부어스트엔 사우어 크라우트라고 하는 절인 양배추.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주방장의 센스 넘치는 배려였을까? 여름이지만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저녁, 맛있는 음식과 개운한 맥주, 서로 다른 도시를 여행하고 온 두 딸의 수다. 유럽여행의 전반부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 자리에 아내가 있었으면 그야말로 완벽한 여행이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