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독일에서 스위스로
대학 시절, 연대에서 이대 올라가는 길 중간쯤, 하이델베르크라는 당시로는 제법 고급스러운 이름의 맥주집이 새로 문을 열었다. 인테리어도 유럽 느낌이 물씬 풍겼고, 산타할아버지 장화처럼 재미나게 생긴 맥주잔이 나왔다. 더 재밌었던 건, 장화 맥주잔으로 맥주를 다 마셔갈 즈음 신발 코 부분에 고여 있던 맥주가 한꺼번에 퐁하고 나오면서 얼굴로 쏟아지기 일쑤였다. 아는 친구들은 잔을 미리 옆으로 돌리는 등 방법을 찾았지만 처음 오는 친구들은 열에 아홉은 얼굴에 맥주를 뒤집어쓰고는 당황해했다.
[하이델베르크 20km]라는 표지판을 보며 문득 대학시절의 맥주집이 떠오르는 건 아마도 그 맥주잔이 너무나 특이했던 탓일 게다. 그 당시엔 하이델베르크가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 도시라는 걸 알 리 없었다. 특이한 맥주잔과 맛이 괜찮았던 소시지가 기억날 뿐.
“아빠, 속도 제한 120km임”
잠시 딴생각하다 속도제한 시점을 지나친 모양이다. 아우토반이 속도 무제한이라고 하지만 일부 구간만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젤까지 가는 동안 공사도 있고, 도시에 접근하면 속도제한이 걸리고 해서 느낌으로는 대략 1/3 정도 구간만 속도 제한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거리 반응형 크루즈 컨트롤은 참 편리하다. 운전의 부담을 많이 줄여준다.
여유가 있었으면 여러 사람이 추천해준 하이델베르크도 들러 대학 중심 도시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일정은 빠듯하다. 오전 중으로 바젤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따지면 바젤 인근에 있는 비트라 캠퍼스가 오늘의 행선지이다. 어제까지 기차로만 여행을 했던 혜진이는 아우토반이 새롭다.
“언니, 지금 이게 아우토반이야. 요기 속도 무제한 표지 보이지? 빗금 세 개가 나란히 그러져 있는 게 속도 무제한 표지야.”
“헐, 속도 무제한이라니... 이런 고속도로도 다녀 보는구나. 와우, 160Km인데 전혀 빠르게 느껴지지 않는걸.”
“다들 이 속도로 달리고 있으니 그렇지. 방금 지나간 저 차는 도대체 얼마로 달리는 걸까? 여기는 오토바이도 다닐 수 있대. 앞에 저 트럭 봐봐! 뒤에 지게차를 달고 다녀. 귀엽지?”
“그러네. 사진 찍어 놔야겠다.”
사흘 먼저 아우토반을 경험해 본 혜나가 언니한테 아우토반에 대해 강의 중이다. 두 녀석 모두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으니 속도 무제한이라는 것과 오토바이도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가 얼마나 생소한 것인지 느낌이 오는 모양이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톨게이트 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혜나의 이야기처럼 이륜차도 달릴 수 있다. 속도 무제한 구간이라고 해서 차선이 많은 것은 아니다. 편도 3-4차선 구간이 가끔 나올 뿐 대부분은 편도 2차선이다. 막히는 구간에서는 하염없이 막히기도 한다. 하지만 속도 무제한이 가능한 것은 철저히 차선을 지키기 때문이다. 추월선은 그야말로 추월할 때만 이용한다. 하염없이 추월선으로 달리는 차들은 찾아볼 수 없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나 예외는 없다. 150-160Km로 달리는 와중에도 왼편으로 추월해 가는 오토바이도 여럿 보인다. 게다가 뒷자리에도 사람을 태운 채로 달리는 오토바이를 보면 내가 섬찟해지기도 한다.
“독일 지명들은 왠지 익숙해요.”
혜진이가 말을 꺼낸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는 표지판에 나오는 도시 이름들이 낯이 익다. 하이델베르크가 그렇고, 서울이 1988년도 올림픽 개최 도시로 발표된 바덴바덴이 그렇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슈투트가르트도 귀에 익은 이름이고 프라이부르크는 환경과 관련된 책에서는 자주 거론되는 도시. 디자인을 전공한 혜진이에게는 더더욱 독일의 도시 이름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민트 드실 분?”
혜진이는 베를린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심심할까 봐 샀다는 민트 사탕을 내민다. 강하지는 않지만 상쾌한 민트향이 입안에 퍼진다. 부드럽게 오래 남는 민트향에 기분이 가벼워진다. 사탕이 다 녹을 때가 되니 이번에는 혜나가 선심을 쓴다.
“초콜릿 드실 분?”
브뤼허에서 산 초콜릿 상자를 꺼낸다. 부드러운 초콜릿과 상큼한 과일향이 잘 어울린다. 이 맛이 벨기에 초콜릿의 맛이군. 초콜릿 특유의 쌉싸름한 맛은 조금 덜한 대신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그렇다고 쉽게 질릴 정도로 달지는 않다. 각각의 맛과 향이 잘 어우러지면서 스펙트럼의 모든 영역을 빈큼없이 메꾸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면서 먹어 치우기에는 정말 아까운 맛이다. 좋은 콩으로 내린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곁들이면 딱 좋을 맛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젤까지 이어지는 5번 고속도로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지나면서 아슬아슬하게 프랑스와의 국경을 스쳐가며 내리 달린다. 국경 너머 프랑스 땅이지만 도시 이름들은 독일식이다. 17세기 프랑스가 완전히 병합하기 전까지는 독일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잠시 독일이 지배하기도 했지만 1919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프랑스가 다시 지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쓰여 있기는 독일식 이름이지만 읽기는 프랑스식이다. Straßburg가 스트라스부르로 불리는 사연에는 이처럼 복잡한 알자스-로렌 지역의 역사가 얽혀 있다. 스트라스부르 역시 이번 여행의 후보지였으나 마찬가지로 빠듯한 일정 때문에 탈락한 아쉬운 도시 중의 하나이다.
전방에 공사가 있는 모양이다. 갑작스레 정체가 심해진다. 내비게이션이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라고 안내한다. 7-8분 정도 막혀 있다 만난 인터체인지에서 인근의 조그마한 마을을 거쳐가는 국도로 내려선다. 양쪽으로는 옥수수 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길은 이내 마을로 들어선다. 제한속도는 30Km/h로 확 낮아지면서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문을 열고 있는 빵집, 그 옆의 치즈 가게, 아마도 어제저녁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맥주를 마셨을 법한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양조장, 마을 중심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예배당의 종탑... 어느새 박석으로 바뀌어 있는 도로포장이 순식간에 우리를 몇 백 년 뒤로 돌려놓는다. 촘촘히 깔려 있는 박석을 지나며 느껴지는 잔잔한 진동과 그 진동을 청각으로 확인시켜 주는 바퀴 소리... 갑자기 많아진 차들 때문에 의아해하는 듯한 마을 사람들의 표정까지...
마을을 벗어나 30분 정도 옥수수밭을 지나고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제법 남쪽으로 많이 내려온 모양이다. 프랑크푸르트보다 햇살이 강하게 비친다.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포도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가면 바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