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의 그늘에 가린 천리안
데이콤이 대학생이 가장 선망하는 '꿈의 직장' 1, 2위를 다투던 시절이었지만, 정작 이 회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적어도 1991년 12월, 002 국제전화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데이콤은 1982년 데이터 통신망 구축을 위해 정부와 민간 기업이 합작 투자해 설립한 회사였다. 독점 체제였던 KT는 음성 통신에 집중하게 하고, 데이터를 전문으로 다루는 제2의 통신회사를 만들어 국가 차원의 분업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정책적 의도의 산물이었다.
데이콤은 전국 규모의 데이터망을 구축했고,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의 전산망 개발을 맡아 성공적으로 경기를 치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데이콤의 큰 자부심 중 하나는 행정전산망 사업이었다. 주민등록, 자동차, 토지 정보 등 국가의 기틀을 디지털화하는 이 거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데이콤은 관련 인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전산 전공이 아닌 이들을 뽑아 자체 교육을 통해 프로그래머나 시스템 엔지니어로 키워낼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자메일과 데이터 서비스를 일반인에게 확장한 것이 바로 ‘피씨서브(PC-Serve)’와 ‘천리안’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까지 PC 보급률이 워낙 낮았던 탓에 이용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무렵 데이콤은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으며 국제전화 시장에 뛰어들었다. 음성과 데이터로 양분되어 있던 시장에 경쟁의 회오리가 몰아친 것이다. 이는 데이콤이 보이지 않는 데이터망 사업자에서 시장 전면의 화려한 주인공으로 등장한 순간이었지만, 그늘에서 명줄을 이어가던 천리안에는 오히려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93년 8월,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100여 명의 장교 출신 신입사원 중 이런 내부 사정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들 ‘연봉 높은 회사’,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성장성 있는 회사’ 정도로 알고 모여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천리안이라는 서비스 자체를 모르는 동기가 태반이었다. 연수원 곳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온통 국제전화뿐이었다. 002의 시장 점유율이 어떻게 될지, 그 성장세가 어떨지에 대해서만 사방에서 떠들어댔다.
교육을 담당한 선배들의 강의도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데이터 통신으로 얼마나 내실 있게 수익을 올렸는지, 앞으로 002 서비스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일지, 나아가 시외전화와 이동통신 시장에는 어떻게 진출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만 가득했다. 천리안에 대해서는 ‘부가통신사업’의 일환으로 이런 서비스도 있다는 식의 짧은 언급만 스치듯 지나갈 뿐이었다.
기존 사원부터 강사, 신입사원까지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천리안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건 오직 나 하나였다. 당시 천리안은 회사를 알리기 위한 ‘간판’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국제전화라는 화려한 네온사인에 밀려 빛이 바랜 상태였다.
우리 100여 명의 장교 특채 기수는 육·해·공군이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그중 육군과 공군 출신이 대다수였다. 쉬는 시간마다 출신별로 모여 미래를 논할 때면, 나는 공군 동기들에게 입이 닳도록 천리안의 잠재력을 설파했다. 대부분의 반응은 “천리안이 뭐야?”였다. 군 시절 몇 년간 천리안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며 확신을 얻었기에 내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고, 내 이야기에 솔깃해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연수를 마칠 무렵,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공군 동기 10여 명과 육군 출신 10여 명이 대거 부가통신사업본부(천리안 부서)로 배치받은 것이다. 알고 보니 내 이야기를 들은 공군 동기들 대부분이 2, 3 지망에 부가통신을 적어 냈다고 했다. 나는 어땠냐고? 나는 1, 2, 3 지망 모두에 ‘부가통신’을 써넣었다. 나중에 인사팀 선배로부터 “부가통신사업본부 인기가 생각보다 너무 높아서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팩트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에 대한 수정이나 PC통신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으신 독자께서는 댓글로 자유롭게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