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출사지 #15] 변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허허벌판에 서서 바람소리를 듣는다. 저 멀리 아스라이 희미한 산자락이 보이고, 내 앞에는 저 만치에 나무 한 그루뿐. 단단히 굳어 버린 뻘 밭과 발목을 스치는 얕은 풀 자락들, 누군가 버리고 간 TV와 스프링이 드러난 낡은 소파... 버려진 마을은 인적도 끊어지고, 눈 길 닿는 사방에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다.
우음도, 육지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경기도 안산 바로 앞에 있던 섬이었다. 시화방조제로 주변의 바다가 뭍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야트막한 언덕이 되어 버렸다. 기록을 찾아 보면 100여 명의 주민이 살던 작은 섬으로 초등학교도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 운동장에 있었을 법한 동물상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단단히 굳어져 있는 뻘 밭에는 아직도 조개 껍질들이 부서진 채 한 때 이 곳이 바다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위로 잡풀들이 우거져 있고, 군데군데 억새도 자라고, 어디선가 버드나무 씨앗이 날아와 제법 큼직한 나무도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다니다 보면 짐승들의 배설물도 보이는 걸 보면 그사이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10여 년의 세월 사이에 바다에서 뭍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아직은 뭍의 풍경이라고 보기엔 익숙지 않다. 그렇기에 사진에 담겠다고 여러 사람들이 찾아 오는 것이겠지.
몇 년 전 우음도를 처음 찾았을 때의 그 생경한 풍경을 잊지 못한다. 사람에 의해 바다에서 육지로 바뀐 자연은 그 육지에 새로이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은 어찌 보면 무심한 듯, 어찌 보면 처절하게 다가온다. 죽어 버려진 생명 위에 새롭게 자라나는 생명들, 어쩌면 사람 역시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듯싶기도 하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우음도 주변은 조만간 또다시 파헤쳐지고, 뒤덮여지는 변화를 겪어야 한다. 신도시가 예정되어 있다고도 하고 외국 영화사의 테마파크가 들어온다고도 한다. 이미 벌판 한 복판으로 고속도로가 놓여 자동차들이 사납게 내달리고 있다. 우음도 언덕 위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무엇을 전망하기 위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자원공사에서는 하수처리장을 짓는다고 벌판에 널찍하게 가림막을 펼쳐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에 마음대로 발을 들여 놓기도 힘든 상황이 될는지도 모른다.
뱃사람들이 바닷물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한 잣대로 사용하느라 저울 형(衡) 자를 붙였다는 형도 역시 우음도와 비슷한 운명으로 뭍에서 야산으로 바뀐 섬이다. 우음도보다 더 얄궂은 형도의 운명은 이 곳이 방조제 건설에 필요한 채석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허리자락이 파헤쳐질 대로 파헤쳐진 섬의 모습은 흉측하다. 이 모습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
우음도 주변과는 달리 형도 주변은 아직 물이 드나드는 곳이 많이 남아 있다. 갈대가 수북이 자라고 있고, 낚시꾼의 흔적도 보인다. 호수 안 쪽으로는 철새들도 많이 와서 새끼를 나아 키우고 있다. 이 곳도 언젠가는 물이 빠지고 육지로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다양한 생명의 모습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한다.
애초에는 우음도의 왕따나무를 찍어 보겠다고 찾았던 곳이었다. 사진동호회 갤러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너른 벌판의 나무 한 그루 풍경이 나름 욕심이 났었다. 그게 우음도 벌판의 버드나무였었고, 우음도를 찾아 가는 길에 형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우음도의 벌판에서 죽음의 흔적과 삶의 태동을 만나면서, 형도의 잘려나간 산허리를 보면서 멋진 사진이 전부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골든타임에 붉게 빛나는 노을 아래 홀로 우뚝 서 있는 버드나무의 휘날리는 나무 가지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새롭게 태동하는 생명, 조만간 사라져 갈 자연, 인간이 자연에게 행하는 폭력,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우음도와 형도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오히려 이런 것들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진은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이지만 그 안에 담기는 것은 아름다움만은 아니다. 사진을 만드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 간에 사진을 통해 주고받는 교감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교감에는 메시지가 만들어진다. 그 메시지는 사진을 만든 사람이 사진에 넣은 메시지일 수도 있고, 감상하는 사람이 사진으로부터 만들어 낸 메시지일 수도 있다. 두 가지 메시지가 일치할 필요도 없고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다.
사진가는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일단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서 보내지만 감상하는 사람이 어떤 메시지를 만들어 낼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감상하는 사람 역시 사진가가 어떤 메시지를 넣었을지 궁금해할 필요 없이 자신이 사진에서 메시지를 만들어 내어도 상관없다. 사진이 갖는 모호성, 특히나 현대 사진의 경우 모호함의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대책 없는 이미지들을 들이밀어 댄다. 이제는 감상하는 사람이 피곤해질 지경이다.
시화호 주변의 이런 저런 모습을 담으면서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을 하기는 하지만 이 메시지가 보는 이에게 전달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가지고 있지 않다. 보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찾아서 간직하면 그 것으로 고마울 뿐이다. 다만 내 사진들이 어떤 의미로 전달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이거 참, 쫓아다니면서 물어볼 수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