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길이란 참 신기한 문명이다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내 차를 몰고 런던까지 가는 것이다. 쉬엄쉬엄 쫓기지 않고 새로운 마을을 느껴가며 며칠이 걸리든 계절을 이어가며 말이다. 낯 선 땅에서 운전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늘 신선하다. 빤할 것 같은 표지판, 가로등, 심지어 차선의 형태도 조금씩 달라진다.
생각해 보면 길이란 참 신기하다. 10센티 조금 넘는 인도와의 경계도 넘기 힘든 자동차 주제에 세계 어디든 길만 이어져 있다면 도달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서울에서 런던까지 가는 도중에 10센티미터의 단차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동차 도로는 자동차를 전제로 한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자동차 도로는 녹아버린 팥빙수만큼이나 허무하다. 길이 있다는 것은 문명이 닿아 있다는 뜻이다. 두텁고 복잡하게 닿아 있던 아주 살짝 닿아있든 간에...
어쩌면 우리의 문명의 본질이 1차원인 것인지도 모른다. 옆으로는 몇십 미터의 이동으로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면서 한 방향으로는 대륙 끝까지 이어지는 1차원 도로들의 얽힘으로 만들어진 문명.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문명을 가로질러 뚫려 있는 길은 폭력적이다. 자연의 속도에 익숙해져 있던 문명에게 엔진의 속도를 강요한다. 그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낯선 땅에 주유소를 짓고, 식료품점을 세운다. 어쩔 수 없이 길로 연결된 문명 간에는 경쟁이 벌어지고, 경쟁에서 뒤떨어진 문명은 쇠락해야 한다.
쇠락한 문명의 흔적을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일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미분점 중의 하나일 뿐, 길은 또 다른 문명을 향해 이어진다.
길 옆으로 또 다른 길이 지나간다. 에너지가 지나가는 길, 통신 데이터가 지나가는 길,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길들도 분주하긴 마찬가지.
거대한 바위산 틈으로 길을 낸 문명에 경의를 보낸다. 한편으로 그 길로 비집고 들어온 문명으로 인해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간 문명에 대해 아쉬움을 함께 보낸다.
길에서 마주하는 황혼은 아름답다. 매순간 바뀌어가는 공간 속에서 마주하는 아주 잠깐의 매직아워는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황혼에서 음악이 스며나온다.
길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지만 그 답은 늘 정해져 있다. 길을 따라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