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호수와 하늘이 만나는 곳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시댁과 친정을 왔다 갔다 하며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아내와 나에게는 조용한 쉼터가 필요했다. 추석 앞뒤로 열흘이라는 연휴가 있었지만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이미 며칠을 바쁘게 보낸 후였다. 문득 누군가가 이야기했던 곳이 떠올랐다. 조용하게 산책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소개와 함께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추천해 준 기억이 떠올랐다. 마장저수지였다.
내비게이션으로 위치를 찍어 보니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차로 30분 정도. 파주 정도의 시골에서 차로 30분이면 이웃이다. 마침 해도 뉘엇하니 노을이 예쁠 것 같기도 했다.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선뜻 나선다. 56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광탄을 지나 완연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이내 도착했다. 생각보다 주차장도 널찍하고 산책로도 잘 갖춰져 있다. 주로 호수 위로 나무데크로 꾸며진 산책로는 물 위를 걷는 기분이다.
늦은 오후 시간 산책로는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붐빈다. 그렇다고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붐비지는 않는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지나쳐 가는 산책객들의 표정이 여유롭다. 산책길은 호수변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고,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다. 밤길을 싫어하는 아내가 돌아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중간에 돌아와야 했다.
추석을 넘기고 한가로이 만난 사진동호회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휴 기간에 하루쯤은 사진을 찍으러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제안한 마장저수지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며칠 후 아침 일찍 저수지 주차장에 동호회 회원들이 모였다.
요즘 같은 날씨면 어쩌면 아침 물안개를 기대해 볼 수도 있었지만 일교차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 물안개는 없었다. 살짝 흐릿한 안개만 살포시 대기를 채우고 있었고, 하늘은 옅은 구름이 쨍한 햇살을 막아서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은 지난여름의 더위에 지쳤는지 탁한 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아침 일곱 시면 제법 이른 시간이고, 인근에 주택가가 없다는 걸 고려해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호수 주변을 걷고 있다. 하지만 살짝 축축한 호수가를 촬영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동쪽의 산자락에는 아직 해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주변은 환하다. 다음엔 조금 더 일찍 나서야겠다.
오랜만에 만난 동호회 회원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호수가를 걷는다. 이미 7, 8년 이상 알고 지내던 친구들인지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명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평범한 시골 저수지의 풍경만큼이나 평범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한 친구가 데려온 보더콜리가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쌉쌀 상큼한 양념을 뿌려준다. 고즈넉한 호수가와 잘 어울린다. 호수 저편으로는 한 무리의 오리들이 한가로이 헤엄쳐 지나간다. 그들이 일으키는 잔잔한 물결이 호수면에 작은 파문을 만들어 낸다. 이 역시 조용한 아침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보석이다.
한가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산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가끔씩 삐져나온다. 호수에 비친 하늘과 구름은 잔잔한 물결과 어울리며 수선스럽지 않은 패턴을 만들어 낸다. 물가에서 자라는 이름 없는 물풀들과 어울리면서 재미있는 그림들을 만들어 낸다. 이 그림들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은 언제나 즐겁다.
사진은 프레임 안에 들어온 피사체를 가지고 그림을 만드는 작업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닌 이상 사진이냐 그림이냐는 더 이상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다. 사진가가 본 것을 전달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순간 느낀 것을 이미지로 전달할 뿐이다.
무심히 걷다 보니 그 길의 끝은 야영장으로 이어져 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캠핑족들을 방해할까 봐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연휴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텐트가 많지 않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일까? 뭔가 불편한 게 있어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일까?
아무튼 이 곳을 조용하게 산책할 수 있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조만간 출렁다리가 완공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감악산 출렁다리로 재미를 본 파주시 공무원들이 여기저기 출렁다리 놓을 궁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공사 중인 출렁다리를 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저수지의 모습도 나쁘지 않겠다.
산책로가 호수 깊숙이 이어질수록 호수와 숲은 부드럽게 섞여간다. 단풍이 짙어지면 호수의 색과 단풍의 색이 섞이면서 더욱더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10월 마지막 주 정도에 마장저수지와 파주 삼릉으로 단풍을 찍으러 갈 생각이다. 무디 그때까지 잎사귀들이 기운을 차리고 생생하게 가을색을 뿜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찌 보면 이 글은 마장저수지의 단풍에 대한 예고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