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을 출발해 광주공항을 거쳐 나주혁신도시로 출장 가는 길. 광주공항에서 나주로 가는 1160번 버스는 공항이 종점인 듯 텅텅 비었다. 배차 시간표를 보니 이미 출발 시각을 몇 분 지났지만, 버스 안 승객은 나 하나뿐이다.
“아가쒸 의째 더우면 창문을 쪼까 열랑께.”
“네. 감사합니다.”
전혀 더운 날이 아닌데 내가 더워 보였는지 기사님은 날씨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공항을 떠난 버스는 광주송정역을 지나 나주혁신도시로 향한다. 몇 정거장을 지나고 나니 버스는 몇몇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로 채워졌고, 차장 밖으로 들어오는 드문드문 있는 단층집, 파란 하늘과 배나무, 내천, 비닐하우스 등이 이곳은 서울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살던 동네도 그랬다. 칠곡군 금산면은 아파트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작은 개울에 난 돌다리를 건너면 이름 모를 들풀이 길목에 늘어져 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활짝 폈고 그 위로 잠자리도 날아다닌다. 그 길 끝에 우리 집이 있다. ‘ㄷ’자 모형으로 가정집을 가운데 두고 축사와 비닐하우스가 양옆으로 있다. 어려서 그렇게 느꼈던 걸까. 마당은 동네잔치를 벌릴 정도로 꽤 넓었다. 거기엔 아빠의 첫차 포니, 나의 첫차 인어공주 자전거,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처럼 지키고 있었다.
4살쯤이나 되었나. 읍내 유일한 자전거 가게인 ‘삼천리자전거’에서 인어공주가 그려진 네 발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 가게와 우리 집까지는 차로 15분 정도 거리이다. 나는 트렁크에 실린 인어공주 자전거가 혹여나 바람에 날아 갈까 봐 전전긍긍하며 집으로 오는 내내 트렁크만 바라보며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 넓은 마당은 나의 자전거 연습장이었다. 지금처럼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자갈과 흙으로 울퉁불퉁했지만, 그렇다고 힘껏 내딛는 페달을 막을 순 없었다. 네 발 자전거였지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처음 며칠은 아빠가 곁에서 지켰다. 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보조 바퀴를 한쪽씩 들면서 세 바퀴로 균형을 잡는 연습을 하다가 완전히 떼어낸 날, 두 발 자전거가 되었다. 균형 잡는 게 쉬울 리 없는 나를 대신해 아빠는 자전거 뒷자리 안장을 잡고 앞바퀴의 움직임에 따라다녔다. 삐뚤삐뚤, 엉거주춤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질 것 같으면 손에 힘을 가득 줘 자전거가 넘어지게 못 하게 잡았고, 그러고도 넘어지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무릎에 새빨간 피가 나는 게 두려워 다시 페달에 발을 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면 아빠는 옆으로 와 핸들을 같이 잡고 나가는 법을 알려줬다. 그러다 언젠가 뒤에서 밀어주는 아빠랑 쿵짝이 잘 맞아서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간다 싶을 때, 나는 오로지 혼자서 페달을 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바퀴가 하나씩 없어질 때마다 안장은 더 높아졌고, 속력은 더 붙기 시작했다.
인어공주 자전거를 언제까지 탔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는 탔던 것 같다. 유년 시절 아빠가 가르쳐 준 자전거 타는 법을 통해 지금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피프틴(경기도 고양 공공자전거 시스템)을 빌려 친구 또는 남편과 주변으로 라이딩에 나서곤 한다.
주말이면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는 아빠들의 모습을 자주 본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한 친구는 아빠에게 계속 “옆에 있어 아빠”하고 외친다. 헬멧, 무릎 보호대 같은 안전장비를 갖추고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아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빠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페달을 굴릴 수 있게 돕는다. 그 모습을 보며 옛날 그 촌 동네 집 마당을 활보하던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당시 30대였던 아빠의 나이가 되어보니, 아빠가 알려준 건 단지 자전거 타기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전거 타는 방법 속에 인생사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삶의 균형을 잡는 방법,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 바람을 맞서는 법 등을 말이다.
살랑살랑 발람 불어 좋은 날 초록이 우거진 개천을 따라 라이딩 한번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