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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Feb 02. 2019

명절, TV를 보다 아빠가 생각났다

명절이긴 한가보다. TV 채널에서 앞 다투어 추석에 방영할 영화를 홍보한다. 추석 특선영화를 살펴보니 예전과 다르게 개봉한 지 1~2년뿐이 지나지 않은 최신 영화가 제법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만 해도 명절 TV를 채운 건 홍콩이나 중국의 무협 또는 누아르 영화가 전부였다. 고등학교 때쯤이 되어서야 명절에 한두 편 한국 영화를 방영하긴 했지만, 영화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여서 90분~120분이란 러닝타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잠들 곤 했다. 요즘에야 관심 있는 영화는 개봉 날 맞춰 보러 가기도 하고, 좋아하는 영화는 다운을 받아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탓에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제법 익숙해지기도 했고, 그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미진진하게 볼만한 영화도 많아졌다. 생각해보니, 누아르에 공감할 수 있었던 나이도, 로맨스를 즐기기 적당한 나이도, 무협을 좋아할 취향도 아니니 그 당시 영화가 재미있었을 리 없다.

그러다 문득, ‘아빠와 함께 극장에 갔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것 같다. 아니 없다. 언젠가 명절에 영화 <쉬리>를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영화 <나 홀로 집에>를 TV에서 본 게 전부였다. 서울에야 곳곳에 극장이 있었겠지만, 내가 살던 읍내에 극장이 들어선 건 아마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때쯤인 1990년 언저리이다. 상영관이라고는 고작 두 개였고, 좌석도 많지 않았다. 상영관이 다섯 개가 넘는 대형 영화관에 가려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대구 시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그 큰 영화관에 간 건 고등학생이 되어서이다. 친구들이랑 우르르 몰려서 본 영화가 <타이타닉>이다. 차디찬 물속으로 가라앉은 배 위에서 뜨거워지는 남녀의 로맨스는 예민할 대로 예민한 고등학생 소녀들의 마음을 훔치기 충분했다. 


왜 한 번도 극장에 같이 가보지 못했을까? 한 번은 가볼 법도 한데. 부모 곁을 떠나 상경했던 나이가 23살이었으니 그 전이라도 아니 그 후로도 한 번쯤은 가봤을 법한데 눈 씻고 생각해봐도 없다. 아빠는 극장에 가봤을까? TV로 본 영화가 전부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영화에 취미가 없었을까? 추석 특선 영화를 보며 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엄마와는 그래도 한 번쯤은 있겠지. 자주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오래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엄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왔다고 했다. 내가 살던, 아니 내 부모가 평생을 살던 읍내, 차를 타고 조금만 움직여도 영화 속 배경과 흡사한 풍경은 쉽게 만날 수 있고 영화 속 이야기와 비슷한 일들은 흔한 데 기껏 본 영화가 <워낭소리> 었다니! 

아빠에게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몇천 원이나 내면서 뭐하러 극장 가서 보노? 좀 있으면 티브이에서 해 줄낀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그런 말조차, 극장 데이트조차 한번 권하지 못했던 무심한 딸이다. 누구와 해도 좋은 건 아빠와 해도 좋았을 텐데, 친구나 애인이랑은 숱하게 가본 극장을 아빠와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이젠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함께 영화를 보고, 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에 대한 평을 나눌 수 있는데 말이다. 지금은 하고 싶어도 같이 극장 가 줄 수 있는 아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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